[묵상글]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전봉석 2024. 9. 8. 03:15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창 49:33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야곱이 열 두 아들에 대해 축복하고 예언한다.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이룰 아들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에 대해 부탁한 후 숨을 거둔다. 야곱의 죽음으로 족장 시대가 막을 내린다. 이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가 새롭게 전개될 것이다.

 

여기서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행해진다. 향후 전개될 열 두 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알리고 그의 구속하심을 밝힌다. 야곱의 예언은 장엄한 시적 형태이다.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 일체감을 심어 주었고, 잊지 말아야 할 주체도 하나님이시며 훗날 이를 확증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예언의 순서는 12아들의 나이순으로 되지 않고 모계별로 전개되었다. 레아의 여섯 아들과 두 첩 빌하와 실바의 네 아들과 라헬의 두 아들에 대한 것이다. 야곱의 축복은 이스라엘 열 두 아들 모두에게 적용되나 죄와 선을 드러낸 후 각기 저주와 축복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야곱의 예언은 하나님의 음성이고, 메시아가 오실 것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한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노아의 예언(9:25-27)으로 시작된 예언은 이삭의 예언으로 이어지고(27:27-29), 야곱이 요셉에 대한 예언으로 나타났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48:15-16).”

 

이 예언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성취되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의 향후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미리 시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다. 12지파로 발전함은 히브인들에게 12란 숫자는 완전수로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을 모든 백성을 의미한다. 실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12지파는 신약 시대 그리스도의 12사도로 이어지고, 그들로 말미암아 복음의 진리를 증거 받은 자들이 144,000명의 성도라는 사실로 발전하였다.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계 7:4-8).”

 

이를 정리하면, 르우벤은 장자로 그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라.’ 하였고, 그 뜻은 ‘끓는 물’이다. 시므온은 ‘기도를 들으심’과 ‘잔해하는 칼’이란 뜻을 가졌다. 레위는 ‘같이 연합함’이고,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함’이다. 잇사갈은 ‘보상받음’으로 ‘건장한 나귀’란 뜻이고, 스불론은 ‘함께 거처함’으로 ‘해변의 배’다. 단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뱀과 독사’를 뜻한다. 납달리는 ‘경쟁함’으로 ‘놓인 암사슴’이고, 갓은 ‘복됨, 행운’이라 하여 ‘전사’를 의미한다. 아셀은 ‘복 받은 자’와 ‘기름진 식물’로 뜻하고, 요셉은 ‘수치를 제거함’으로 ‘무성한 가지’이다. 베냐민은 ‘기쁨의 아들’이나 ‘물어 뜯는 이리’라는 뜻을 가졌다.

 

이 가운데 이스라엘의 한 지파에 불과한 유다가 구속사의 중심부에 출현한다. 선민을 지칭하는 데 있어 그 안에 메시아의 씨를 내포하고 있다. 10절에서,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하심과 같이 야곱은 이 지파가 왕권을 가지고, 장래를 쥔 통치자로 비유하고 있다.

 

야곱의 이 예언은 다윗으로 실현된다. 이 혈통은 1세기를 못 넘기고 분열하여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함으로 영원한 왕권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단순히 유다가 강성한 지파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축소할 수 없다. 이 모든 예언은 유다 가문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2, 17).”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그러므로 각각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 49:28).” 이것은 단순히 야곱의 편견이나 편애에 의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장래에 대한 예지로 이루어졌다. 표면적인 축복의 차이가 너무 현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면 야곱의 상속이 불공평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후손들이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감당하여야 할 사명’들을 알고 있었다. 이를 그 분량대로 축복한 것이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와 같이(마 25:14-20),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부여하신 일련의 상황과 여건은 그 몫에 충실함으로 충성된 종이 된다. 오늘 야곱의 예언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특징은 첫째, 이스라엘 민족의 발상지는 가나안임을 상기시킨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6).” 둘째, 약속의 땅 가나안을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낸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46:4).”

 

이에 따른 구속사는 개인의 행적에 있지 않다. 성경은 야곱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예언과 성취될 장래를 우리 앞에 펼쳐놓으신다.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길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순응하는 것도 보여준다.

 

죽음에 관해서는 육체적 죽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영적 죽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 둘로 나뉜다. 육체의 죽음에 대해 성경은 ‘흙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이를 욥은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욥 7:21).” 하는 고백으로 우리 육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시인은 죽음에 대하여,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 22:15, 90:3-4).

 

이를 다양하게 종합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창 25:8, 17).” 또한 ‘세상을 떠나 가는 것’으로 나타낸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하는 표현으로 바울은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 하였다.

 

베드로는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5).” 곧 우리가 이 세상에서 떠난다는 것으로 죽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장막을 벗어나는 것이란 표현으로 이 육신을 떠나는 것을 강화시킨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4).”

 

또는, ‘잠을 자는 것’과 같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 13:3).

 

이에 대하여 예수님도 이르시길 ‘잠들었다’고 표현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이에 ‘잠들다’, ‘조상들과 함께 묻히다’, ‘썩다’ 하는 표현으로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행 13:36).” 이어서 바울도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 하는 표현으로 우리의 육신과 영혼의 상태를 알게 하기도 한다.

 

야곱의 예언과 그의 죽음을 두고 가만히 생각을 모아 그 의미를 찾아보다, 새삼스러우나 우리의 제한된 시간과 육신의 한계를 생각하였다. 곧 이를 욥기에서는 ‘기운이 끊어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음도 발견하였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욥 10:18, 14:10).”

 

이를 정리하면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귀결된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이를 예수께도 적용하여,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 27:50).” 하고 마태는 서술하였다. 곧 그 영혼이 떠나는 것으로,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사는 동안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는 하나, 예수님은 이르시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심으로 이 죽음이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하시고, 믿음으로 살 수 있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않고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성경은 밝히신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그리하여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오늘 나는 말씀에서 열두 지파에 대한 예언과 축복 이후 야곱의 죽음을 평안함으로 묵상하게 된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창 49:33).” 가끔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다, 두려움보다 평안함으로 앞서 돌아가신 이들의 평안을 상상하고는 한다. 저의 생이 고달팠고 그 고단하였을 삶을 두고 애틋해하기보다 비로소 주 안에서 영원한 평안의 안식에 드는 것으로 나는 가끔 이를 묵상하고 상상하며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살면서 사는 동안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외면과 침묵이란 사실을 상기한다. 내가 부르짖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잠잠하신다면 나의 영혼은 얼마나 두렵고 겁날까?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시 28:1).

 

그러므로 오늘도 기도한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

 

그리하여 오늘의 위로와 감사는,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6).

 

주가 응답하심으로 평안하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고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7-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