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 50:20-2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야곱이 죽었다. 그의 유언대로 장사된 뒤 요셉도 백세를 채우고 죽었다. 이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시대를 거쳐 요셉의 대에 민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야곱이 죽은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두고 요셉의 보복을 우려하였다. 그때에 오히려 요셉의 말이 은혜롭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노예로 팔려 20여 년의 시절 동안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굳건하여졌다. 우리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구원을 찾는다. 오히려 저들 형제를 위로하며 그들과 그들 자녀를 건사할 것을 약속한다.
정작 죽음의 슬픈 이야기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과 훗날의 출애굽이 태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구원의 소망을 가져다주었다. 이 땅에서의 안위로서가 아니라 더 나은 생명의 구원이 있음을 알게 하는 축복의 시작이다. 곧 죽음이 삶의 종결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큰 삶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린다.
곧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그리하여,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우리는 죽음의 참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런 가운데 회개와 용서의 아름다움을 본다. 형들이 그 죄를 인정하는 데서 복수와 응징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의미를 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귀결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는 보복과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데 전심을 다하는 일이다. 저들 형들이 먼저 부친 야곱의 죽음으로 ‘도단 사건’(37:18-36)을 떠올리며 두려워하였다. 이에 용서를 구하고(50:19-20), 요셉은 ‘진정한 용서’란 무엇인지 그 표본을 보여준다.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앞서도 저들이 두려워할 때도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요셉은 그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바로 알리었다. 이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먼저 규정하고, 그런 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정리하는 것이다. 지나온 날들 가운데 그 속에 어찌 어려움이, 원망과 슬픔이 없었겠나? 이를 주 앞에 내려놓음으로 요셉은 이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즉 잘못을 인정하는 형들의 참회와 이에 따른 판단을 스스로 재단하여 용서하거나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김으로, 오늘 우리로 우리 안의 어떤 앙금을 다루는 데 있어 그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회개와 용서’는 주의 것이다. ‘믿음과 구원’이 주의 것이듯 주가 주시지 않으면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곧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그의 나라가 임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오늘 우리가 사는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이와 같이 주를 인정하는 데서, 우리는 ‘용서와 사함’을 주께 맡김으로, 이 땅에 살면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다만 악에서 하시기를.’ 그러할 때 ‘주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고하고 인정하는 데서 기도의 시작과 끝이 있다.
어느 교단은 주기도문도 사도신경도 축복기도도 모두 예배에서 빼버렸다. 무슨 영문으로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여기서 ‘지나치게’는 자신의 의지나 신념으로 하는 모든 의도 지혜도 악도 우매도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오늘 요셉은 형제들의 사죄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의지나 신념으로 용서를 외치거나 그에 따른 엄중한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다만 그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데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범주인 ‘지나치게’ 선하려 하거나 악하려 하지 않는 일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요즘 일련의 상황에서 새삼 다시 사람과 사람의 일에서 저마다의 생각과 판단이 다름을 알겠다. 이를 어찌 해결하는 데 있어 마음은 나 역시 옳고 그름을 따져 싸우거나 응당 내 몫을 요구하려 하겠으나 그리할 수 없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내려놓는다. 나의 이 ‘그리할 수 없음’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있다.
곧 ‘용서와 사함’은 주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면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랄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할 때 이를 역설적으로 되새김으로 그 안에 답이 있다. 곧 ‘내가 주 앞에서 나의 죄를 사함 받은 것 같이, 이를 인정한다면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일이 주의 권능으로밖에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할 때 ‘주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도 용서도 모두 주의 것임으로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의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위의 것’을 사모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할 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하여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돌아보면 이에 대한 평안을 주가 더하셨다. 내 안의 어떤 슬픔과 원망에 대하여… 나는 일찍이 시쳇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학교폭력’을 당한 바 있다. 왕따에 은따에 괴롭힘과 놀림과 빼앗김과 그 모든 피해 가운데 나의 청소년 시절은 암울하였다. 더 어릴 적부터 초등학교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는 스스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니까, 어린 게 그 마음에 얼마나 큰 노여움으로 견뎌왔을지…. 그런데 돌아보면 그때마다 내 곁에는 ‘주의 천사’가 항상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중등부 때 교회에서 ‘천사게임’을 하였고, 그때 나는 누구로부터 글쓰기의 놀라운 치유와 위로를 배웠다. 나의 순수하였던 사랑이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이 말 저 말 우리 속에 있는 감추어진 슬픔을 모두 토해내게 하였던가? 상대적으로 그 여학생도 나환자인 아버지와 절름발이인 어머니 사이에서, ‘나환자촌’이라는 특수한 생활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스스로의 토설로 치유가 되었을 것을 안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그렇게 3년 반 동안 주가 더하신 ‘천사’와 함께 이 땅의 모든 불합리와 불평등의 시간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게 하셨다.
나의 생애 단 한 순간도 주의 은혜가 아니었던 적이 없던 것을 나는 너무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앞서 그 소녀를 만나기 전에 더 어릴 적에 혹은 내 안의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놓여나게 하려고, 하나님은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을 수술 날짜로 잡아 손양원 목사님의 애양원교회 그 마을에 있는 애양원병원에 눕히시고, 그곳의 숱한 나환자들의 생활을 마주하게 하셨다. 어린 나이에 그 세계는 놀라운 공포와 위안이었다. 더하여 내 곁에 소경 장로를 두시고 반 년 가까이 저와의 교제와 성경공부로 나의 유년을 위로하시고 더 나은 세상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음을 알게 하셨다.
오늘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고 그 형제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용서는 말 속에서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그에 따른 섭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그러므로 오늘을 살면서 다가오는 여러 분노와 갈등을 ‘주의 이름으로’ 마주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주의 뜻이 하늘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위하여, 나의 중심에 하나님이 좌정하심을 감사해 한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0-11).
오늘을 살면서 그런 가운데서 별의 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내 안에 좌정하심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심이었다. 누구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면 저마다 거들며 응당 어찌 해야 할 것을 강요하지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주께 맡김이란 내 안의 평안이었다.
내가 억울하고 답답해한들, 갈등하고 반목한들… 그것으로 상한 심령은 주께 더욱 호소하게 된다. 이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그러할 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5).” 어찌 이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 한데,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9:2, 28:7).
하여,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우선 나를 앉히고 주시는 말씀과 주어진 상황과 내 안의 여러 생각과 생각을 주 앞에 아뢰는 것이었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6-7).” 이 놀라운 은혜와 은총으로 사는 삶이 복이었다. 이와 같은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주의 권능으로였으니….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29:1-2).
하면, ‘여호와의 소리’가 물과 나무와 불과 광야와 삼림의 모든 가운데서 역사하심이었으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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