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전봉석 2024. 9. 10. 02:57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출 1:20-2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시 30:11-12

 

 

약 400년간의 침묵기가 흘렀다.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고 이를 두려워한 애굽이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려 그 숫자를 제한하려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느 시점에 일상이 구겨지듯 뒤틀리며 나른한 오후 같던 것을 바로 세우신다. 바로의 탄압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초래하는 것과 같다.

 

애굽에 이주한 70명의 야곱 자손이 400년의 시간동안 번식하여 증가하고, 이를 압제하는 애굽의 새 왕이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이려는 일을 꾸민다. 곧 이스라엘의 고난이 가중되고 그로인한 출애굽의 동기를 이룬다. 여기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관을 볼 수 있다. 주의 백성을 고난의 현장으로 몰아가실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뜻이 있다. 이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성경은 우리로 알게 하신다. 우리의 불평과 좌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일은 그 뒤에 감추어진 ‘영광된 미래’를 바라게 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나는 일련의 상황을 겪을 때면 그런 가운데 주의 뜻을 살피려 한다. 사람들의 저마다 의견은 참으로 같잖아서 쏟아지는 자기방어와 그에 따른 여러 말과 말의 부딪침이 고달프다. 더러는 원치 않으나 중간에 끼어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문득 나 또한 나의 입장이 있는 것이란 걸 새삼 보게 된다. 그러니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 그 뜻을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데서 현재의 고난과 그 너머의 숨겨 놓으신 비밀한 일을 살펴본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를 위해 기도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1, 14).”

 

곧 오늘의 이런저런 일들이 더러는 우리로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속한 자로 알게 하지만 더하여 이 세상이 우리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도 일깨운다. 이에 ‘세상은 우리를 핍박한다.’ 하여 이르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곧 세상을 사는 동안 세상으로 인한 여러 일로 고난을 당하나 동시에 또한 성도로서의 신앙을 더욱 강화하게 한다. 그러면 고난은 동시에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게 한다. 곧 내가 속한 곳이 어느 쪽인지를 알게 한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그러니 어떨 때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우릴 당황스럽게 하는 일이 그것으로 내가 주의 백성으로 주의 나라에 속한 백성인 것을 알게 한다. 하여 70명의 야곱의 자손이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창 46:27).” 야곱이 죽고 요셉도 세상을 떠난 뒤에도 430년 동안 애굽에 머물면서 장정만 60만으로 증가하는 놀라운 번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로인하여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9-10).” 여기서 이스라엘의 번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다. 그로인한 애굽의 압제는 바로를 세워 하나님의 축복을 시기하는 사단의 적개심이 분출시킨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들은 본래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그런 우리는 기쁨을 누리며 산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살전 5:15-16).”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게 되는 것이 우리의 유전이다. 이를 또한 들으시는 이는 여호와시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이를 두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르셨다. 즉 고난 가운데서 신앙의 절개와 기쁨을 잃지 않기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그럴 때 우린 깨닫는다. 즉 고난도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되는 것을, 이 역설의 현장에서 우린 주를 부른다. 하나님을 바라는 우리의 믿음 안에서 이미 주어진 복된 삶과 고난의 삶이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역사를 깨닫게 된다. 곧 이 땅의 여러 일이 마치 장구하여 승승하는 것 같으나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모든 일이 잠깐이다. 이를 알 때에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삶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6-7).

 

이를 바울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

 

이때에 고난이 우리로 일깨우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더러 잊고 사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37).” 이와 같은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 나는 일련의 사태와 그로 인한 마음의 어려움에서 주가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본다.

 

곧,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7-39).”

 

그러므로 우리로 더욱 확신하게 하는 한 가지 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오늘의 이스라엘이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400여 년의 캄캄한 시간들을 우린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세상에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때마다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을 확인하게 되는데,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빛과 같이 우리 가는 길을 비추고 계셨다.

 

나는 이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 주가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에 감격하고 자랑하게 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우리로 이를 인정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릴 돌보신다.

 

이 길이 아닌가 싶어 엉거주춤 서있을 때, 돌아보며 갈등하고 있을 때, 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일을 풀어가고 계셨다. 그때마다 우리는 주의 뜻을 확신하게 된다. 나는 이를 찬송하고 감격하다가 나의 어리석고 나약함에 다시 한 번 송구할 따름이다. 그때마다 주께 간구하며 부르는 찬송으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11, 43:5).

 

시편 속에 내가 있고, 나의 일상 가운데 시편이 스민다. 당장 세상은 우릴 넘어뜨리려 하나 그로 인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 놀라운 원리가 오늘 등장하는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통해 죽음을 각오하고 주를 경외함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한다. 하여,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출 1:20).” 이에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21).” 이 원리가 오늘도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30:1).

 

곧 삶이 나를 노엽게 하나,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2).

 

그러므로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4-5).

 

그리하여,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0-11).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