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전봉석 2024. 9. 11. 02:27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 2:24-25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23-24

 

 

모든 상황이 마치 그리 될 게 그리 되는 일처럼 풀린다. 당장의 어떤 불편함이나 오해가 오히려 선을 이루는 과정이 된다. 즉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신 말씀에 따라 모든 게 맞물려 하나로 진행된다.

 

오늘 말씀은 상당히 급박하면서 긴장감 넘치게 진행된다. 애굽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여 애굽에 위협이 되고, 바로 왕은 그에 따라 이스라엘을 억압한다. 그런 가운데 지도자 모세의 출생과 성장, 자기 발견과 미디안 광야로의 도피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바로가 이스라엘 어린 남자 아이를 학살할 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모세는 애굽 궁정에서 양자로 성장한다.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데 있어 이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우리는 신기하고 조화롭게 본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는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그러므로 어느 때에라도 상관치 않고 하나님은 은혜 베푸실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에어컨 파동’으로 일련의 사건에서 교회를 옮길 생각도 하였다. 그 일로 대대거리며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 싸울 수도 없고, 하여 어디 중학교 앞에 좋은 자리가 나서 거의 나가기로 결정할 판에 임대인이 나서서 전기분리 공사와 에어컨 설치까지 모든 것을 다 해결하겠다고 붙든 것이다. 당시 주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나는 그저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주께 아뢰며 이를 두고 다툼이 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결국 ‘그럴 리 없다’던 것으로 주인이 몇 백의 돈을 들여 이 모든 일을 해결한다고 하니….

 

그리 될 일을 그리 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모르실 리 없다. 그때 그 즉시 권능의 힘으로 구원하실 수 있으나 고통으로 무르익어 ‘고난당하는 자의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모든 일이 다 허사임을 알게 하신다. 그때에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섬기며 주께 아뢰는 것뿐이다. 그렇듯 하나님의 구원을 갈구할 때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게 하신다. 우린 늘 바람 앞의 촛불처럼 때로는 우리의 의지로 해결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때 하나님 외에 달리 의지할 수 있는 게 없음이 복이다. 나의 약함과 억울함이 애통하는 심정으로 주를 부르게 한다.

 

장차 우리에게 임하실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아 알게 하신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이를 인정하는 데서 오히려 감사와 영광을 올리게 하신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왕상 18:21).”

 

생각 같아서는 같이 이것저것 따져가며 나 역시 억지를 부리듯 내 생각으로 일을 처리할 수도 있으나 앞서는 생각이 이곳은 교회이고 나를 저들은 목사라고 부르니, 그 호칭의 무게와 이곳의 진정성이 훼손될까 하여 양보하고 물러서다 조용히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던 터였다. 어려운 형편에 얼추 100여만 원 넘게 돈을 들여 꾸며놓은 것이 아깝기는 하나 다툼에 휘말리면서까지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러자니 또 이사에 따른 비용이 이래저래 200여만 원은 들어갈 텐데, 생각이 많은 가운데 주가 이루시는 일이라니!

 

신앙은 결단 없이 이뤄갈 수 없다. 결단은 신앙 없이 내려질 수 없다. 우리가 주를 신뢰함은 당장의 이런저런 억울함까지도 주의 이름 앞에 내려놓는 수밖에 없다. 이에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행 7:29-32).”

 

모든 이야기의 전개는 주의 뜻을 이루는 데 있다. 이때 우리는 온유함을 배운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곧 예수께서 그러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의 온유하심 앞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주 안에서 모든 상황에 충성하게 된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 12:7).” 주께서 저를 인정하심과 같이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2, 6).”

 

온유는 충성하게 하고, 충성은 의를 위하여 분을 표출하게 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 예수님도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의로운 분은 주께 향한 마음의 정도에서다. 나의 이익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나는 속상하고 화가 나는 마음을 가만히 옮겨 이곳을 떠나는 것으로 삼으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럴 리 없다’던 주인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심정을 모른 체 하지 않으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이는 엄연한 약속의 말씀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이 놀랍고도 간단하며 명료하고 확실한 진리 앞에 ‘누구든지’ 그러하기가 그만큼이나 어렵다. 그래서일까? 저마다의 판단과 생각으로 이런저런 조언을 하거나 어떤 의견을 더할 때 나의 마음은 오히려 더 불편하고 어려웠다. 친구의 이치에 맞는 말들이 나를 더 어렵게 하여 이어서 말을 더하지 않고 피하게 했다. 다만 한 가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 모든 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교회를 위하는 일’이면 어떠하든지 내가 물러서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일로 마음은 볶여 잠을 설치기를 며칠씩 하다 주께 아뢰고 결단을 할 때,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신앙은 그와 같은 결단과 결단이 혹은 선포와 선포가 나에게 부여될 때 새 힘을 얻게 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어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로써 교회가 서고 주의 종으로서 이뤄야 할 덕목을 세워갈 수 있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이로써 우리의 사명은 늘 현재진행형이 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해석을 운운하며 문자적인 이해와 상징으로가 아니라, 오늘은 모세가 되어 저의 순종이 나의 순종이 되게 한다. 이때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18-19).”

 

나는 무엇으로 위로하심을 받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나는 한 걸음 더 주께로 나아간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121:5-8).

 

이를 오늘 살면서 사는 가운데 주 안에서 이뤄가는 일이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심과 같이 오늘 모세는 죽을 수 있는 유아시절 바로의 왕궁에서 자라고, 자신의 의협심에 미디안 광야로 쫓겨가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일찍이 주가 다 아신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0-31).”

 

오늘 이 모든 일들 가운데서 주가 이루신다. 주가 다스리시며 주가 계획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나는 늘 나의 사소한 일들 가운데서 야곱의 하나님,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 모세를 불러 세우시는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확인한다.

 

때론 엉뚱하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여건에서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이와 같은 고백이 나의 것이 되게 하신다. 그것이 더러는 어려움 중에 힘에 겨워 쓰러지고 낙심할 때에 일어나는 일이어서, 이제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 때 이것으로 주가 이루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그렇게 오늘은 모세가 쫓겨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서 은둔 아닌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예비하신 순탄한 길로 인도하시었다. 오늘의 모든 상황 속에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그렇듯 성경의 모든 인물은 예수님의 예표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이정표가 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확답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여러 번 되뇌며 오늘을 다시 주 앞에 앉아 시작한다. 무엇이 더 나은지, 어떤 일에 더 마음을 쓰는 게 옳은지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8-9).”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시편을 살게 하시기를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31:1-2).

 

이는 결국,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3).

 

주의 이름을 위하여서,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15-16).

 

그리하여,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