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전봉석 2024. 9. 12. 03:12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 32: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되었다. 이를 위하여 모세를 일꾼으로 세우시고 준비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은 그 사역의 시작으로 모세 앞에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신다. 타는 불꽃 가운데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 사이에서 음성이 들린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하고 저가 가까이 오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늘 내가 신고 걷는 신을 벗으라 하신다! 나의 의지와 노력에 따른 그 어떤 의뢰도 벗도 벗어내고 오직 주만 바라게 하심이다. 하고 부르시는 목적을 밝히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7-8).”

 

우리로 주 앞에 나오게 하심에 따른 소명이 무엇인가 살피게 한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밝혀 주시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명확히 하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14-15).”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모세를 앞서 부르셨다. 그 과정에서 모세는 왕자에서 도망자 신세가 되어 광야 40년의 세월을 훈련하였다. 모세는 성실하였고 정직하였다. 목자로 양을 치다 부르심을 받은 다윗도 그러하였다. 사무엘이 더 남은 아들을 찾을 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삼상 16:11).” 어부로 자신들이 일터에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도 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8-20).”

 

주신 상황 속에서 무던하게 그 자리를 지킬 때 어느 날 주가 부르신다. 저들은 성실한 자였고, 겸손한 자였다. 겸손은 자신을 복종시켜 순종하여 제자가 되게 하는 밑거름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처럼 모세의 소명은 구속사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게 하시는 데 무려 80년의 훈련을 쌓게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가 호렙 산으로 양을 치러 갔고,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발견하였다. 곧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임재는 느닷없는 듯하나 앞서 예비하신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도,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6-7).”

 

요셉에게 나타나실 때도,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이처럼 우린 뜻하지 않은 순간에 주의 나타나심을 경험하는데, 뒤에 살펴보면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앞서 준비하고 예비하심을 알 수 있다. 그날 모세의 호렙산에서의 하루는 평소와 다름없는 날 같았으나 4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하나님의 미리 계획된 실행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진다. 주의 임재 앞에 우린 꼼짝할 수 없다. 어느 순간 죽으려는 찰나에 훅, 하고 내 안에 끼치는 두려움은 나도 모르게 ‘주님,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로 튀어나왔다. 그저 막연하고 무료한 새벽 낚시 때였는데, 짙은 안개로 깊은 물속은 매혹적인 구름 위를 앉아 있는 듯하였다. 툭, 툭 떨어지는 눈물이 내 것이 아닌 듯 생경스러워하다 ‘주님!’ 하고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부름으로 모든 게 무너졌다. 애쓰며 안간힘을 다해 살았던 나의 시간들이 모래 기둥처럼 허물어지는 듯하였다.

 

늘 같은 광야, 같은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듣는다. 하나님은 그 시간에 맞추어 모세의 시간에 개입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시간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거룩하시다. 그 웅장한 권능 앞에 속수무책이다. 죽고 싶다던 마음은 강한 두려움으로 쫓기듯 새벽 낚시를 접고 집으로 달려와 가족들 앞에 엎드리게 하였다. 등교 준비로 한창이던 아이들과 잠이 덜 깬 아내를 두고 나는 울면서 나의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고백했다. 그날 아이들은 한두 시간 지각을 하였고, 영문도 모른 채 우린 같이 어리둥절하게 울었던 것 같다.

 

애굽의 종살이로 고난당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임재는 모세를 통해 백성들을 구원하려 하신다. 구속사에 따른 계획은 더디고 막연하여 반감과 원망의 대상이 되게도 한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을 일러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15).” 하고 조상들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4).” 하고 이르게 하신다.

 

부르심은 언제나 당사자도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힘과 믿음으로 채우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4-5).” 하심으로 실은 오늘 우연히, 어쩌다 이리 된 것 같으나 이에 앞서 나를 모태에 짓기 전에, 나로 모친의 배에서 나오기 전에 주가 구별하셨고 세우셨다.

 

그 이후 나의 시간은 늘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해 신대원을 떨어졌고, 이 길이 아닌가? 하는 갈등으로 시달리면서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죽기 살기로 새벽예배를 나갔다. 오죽하니 당시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무슨 불치병에라도 걸렸나? 하고 걱정하였다고 했다. 이듬해 신대원에 들어가면서, 내가 의지하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던 ‘나의 신’을 벗기시는데 가히 불가항력적이란 말이 그런 것 같다. 돌려막던 카드가 하나둘 막히면서 순식간에 회생불능이 되었나 싶을 때, 공황이 오고, 가까이 하던 친구들과 선생은 서로 연락이나 한 듯 등을 돌렸다. 누구는 그때의 나에게 ‘현실도피자’라 했었다.

 

성경의 분명한 입장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계기로든지 부르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어, 그런 가운데서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황이 오고, 대인기피 비슷하게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렵게 됐다. 하기는 하면서 하기 싫어서 울면서 신대원을 다녔다.

 

그때의 나의 심정은 어떤 이유로든 짤리거나 그만둘 수 있는 계기만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 매 학기 학비를 전혀 예상치 못한 이들의 손길을 통해 주가 감당하셨다.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얼추 5년의 시간 동안 나는 개인회생으로 무절제했던 삶의 결과를 청산해야 했는데, 그런 가운데도 신기하게 아이들이 글방에 딱 그 만큼씩 모여들었다. 3년간의 대학원 학비는 누군가의 돕는 손길로, 그런 가운데서도 모여오는 아이들로 신대원과 개인회생 5년을 무사히 끝내실 때… 두 번의 목사고시 낙방의 원인이 하나는 거의 평생 논술과 글쓰기를 가르치던 사람이 다른 과목은 다 통과하고 논술에서 한 번 떨어지고, 다음에 도입 된 인성검사에서 떨어졌다.

 

당연히 내 길이 아닌가? 하고 있을 때 가까운 누구의 죽음을 곁에서 지키게 하셨고, 나는 그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저의 마지막 50일을 매일 아침 만나면서 에베소서와 로마서를 나누다가 저의 눈을 감기며 주의 나라로 가는 마지막 순간을 지키는 영광된 자리를 집도하게 되었다. 나에게 저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였다. 이를 저에게 고백하며 죽음으로 두려워하는 저의 곁에서 주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 내가 주 앞에 고꾸라졌다. 연거푸 낙방을 하고 세 번째 다시 응시를 하면서 다시 왔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갈 곳이 없다는 말로 나의 막다름을 알렸다. 그런 가운데 또 떨어져도 된다고 자신하였다.

 

나는 가끔 그때의 심정으로 오늘의 이 부족한 사역을 감당한다. 그땐 정말 평생을 떨어지고 다시 준비하여 또 떨어지고 다시 준비하다 남은 인생을 다 허비한다 해도 괜찮았다. 더는 다른 수가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때 알았다. 어디가 아픈 날, 혹은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교회를 해야 할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날, 누구로 인해 지긋지긋하여 도망치고 싶을 때, 그야말로 다 때려치고 싶을 때, 나의 가장 큰 힘은 ‘나의 약함’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세상은 우리에게 준비된 자를 쓰시고,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하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인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성경을 겉으로만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을 보라 하신다. ‘스스로 있는 자’의 거침없는 행하심을 보게 하신다. 더러는 그의 백성들이 싫다고 아우성일 때도, 그렇게 모세를 죽이려 할 때도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하고 달려가는 다윗과 같이 순진하고 바보 같은 믿음만을 보신다.

 

그런 점에서 나는 종종 주의 마음대로 하시라, 하고 나 몰라라 한다. 아니 주께로만 내 마음을 향한다. 어떤 일로 곤란을 겪다, 당장 이번 달도 간당간당하여 여기까지인가, 싶을 때도 ‘주가 행하시라.’ 하고 주께만 다 맡길 때… 신기하지 우리 주님은 그걸 기다리시는 분 같다. 언제 내 입에서 주님! 하고 외마디 외침이 나오는가? 하고 마치 기다리시는 것 같다. 그때마다.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5).”

 

저가 누구신지,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를 알게 하신다. 하여 나는 오늘도 불 붙은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신을 벗는다. 그리고 아이와 어제 못한 성경공부 구절을 찾아 오늘 아침 같이 나눌 말씀을 준비한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요 2:9-10).”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은 ‘복종의 원리’를 알게 한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였고(4절), 이에 따르는 하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며 순종하는 것으로 이 놀라운 기적은 현실이 됐다.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을 지정해 드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복속시킨다.’ 마틴 루터의 말이다.

 

겸손의 원리에는 변화의 원리가 따른다(6-9). 항아리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다. 이 이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죄인들이 변화되어 것과 같은 원리다. 말도 안 되는 사람이, 그 대상이 성도가 된다. 구원은 변화다.

 

또 하나 이 항아리의 술은 발효가 아니라 절제로 빚어진 것이다. 곧 복종과 변화와 절제의 원리로 덕을 가르치신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단지 여기서 포도주는 술이 아니라 훗날에 예수님이 흘리시는 보혈의 의미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 5:45).”

 

이 구절은 앞서 이어지는 모세의 율법에 함몰되어 형식과 그 절차로 자신들을 선하고 의롭다 여기는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당시 구약 성경을 믿었더면 예수님을 알았을 것이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모세오경’과 그 가운데 담긴 율법주의로 사로잡힌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와 같은 말씀이 저들로서는 생소하고 신성모독이었다. 말씀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마술적이란 소리가 아니다. 주께서 이적과 기사를 베푸신 것은 당시 헬라문화의 신비주의나 범신론적인 마술이 아니다. 말씀은 늘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허튼 데 마음 두지 말 것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더는 누구인지 분명히 하신다.

 

하여,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2-3).” 이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오늘의 나였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나의 소망이다. 그리하여,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

 

이 놀라운 은혜 가운데,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