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전봉석 2024. 9. 13. 02:30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출 4:3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예단하고 주의 소명을 거절하는 모세의 모습이 겸손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어쩌면 자신의 연약함에 스스로 안주하려는 모습이 오늘 이 본문의 여러 부분에서 비춰지는 것 같다. 곧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보다 나의 연약함에 기대어 주가 더하시는 사명을 외면하려 들지는 않는지….

 

모세는 소명을 받고 여전히 주저한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1).” 이는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까, 하는 마음으로 주저하고 망설이는 나의 됨됨이와도 일치한다. 이에 지혜서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는 말씀에서 나의 고질적인 유약함을 인정한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여러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요 7:13).” 곧 나의 삶에서 내가 주 앞에 바로 서지 못할 때, 담대하게 저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할 수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나 그 지위가 걸림이 되는 것이겠다.

 

그런 나 자신임에도 주가 사용하신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하여 나는 종종 누가 온다하거나 어떤 이를 상대해야 할 때 주 앞에 아뢴다. 하면 주께서 이르시길,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마 10:19).” 이때에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2).” 하심을 의지한다.

 

그러기까지 나의 약함으로 나는 주께 안달이 난다. 하다못해 요즘 주사치료를 받을 때도 주사를 맞는 것보다 이를 기다려야 하고, 들어가 준비한 후 또 대기해야 하는 그 시간을 나는 늘 두려워한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면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이었다. 순간 속이 불편하고 식은땀이 나고 더 심할 때는 호흡이 가빠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 같다. 엊그제도 무릎은 초음파실에서 목과 등에 맞을 때는 엑스레이실에서 맞는데, 그에 앞서 나는 주저하고 힘들어하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꾹 참았다.

 

하물며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 저마다의 생각과 그 의지나 주장이 각각 다른 것이어서 아무리 옳고 그름을 따진들 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눈을 질끈 감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나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곧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20).” 한 영혼을 대하는 일이란 이처럼 어렵고 난처한 일이기도 하여 내가 하려하면 부딪치기 십상인데, 주의 뜻에 매인자로 설 때 나의 주장은 그리 앞설 게 없어진다. 다만 그러기까지 속에 부대끼는 일로 주 앞에 엎드릴 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게 나의 전부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행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때론 아닌 것 같을 때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주를 인정하는 데서 세상 위정자들의 주장에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우린 저들을 놓고 ‘어느 쪽이냐?’ 묻는 세상에서 세상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너무나 교회가 사회에 편승하려 부화뇌동하듯 정치화된 현실이 구슬프다. 동생이 어디 부교역자로 면접을 보러 갔는데 특정 정치인을 들먹이며, 저를 어찌 생각하는가? 하는 물음에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교회 또한 어느 쪽이냐, 하며 좌와 우를 선택해야 옳은 것인가?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좋다고 하여 그의 유튜브를 보다 구독하기를 취소하였다. 말씀을 전하기보다 뭐 그리 세상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자신의 교단과 교리를 주장하는 데 설교의 반을 허비하는지….

 

교회나 목회자가 정치화 돼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장사나 돈벌이를 조장해서도 안 된다. 하여 나는 자주 정치 이야기와 다단계 등을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의 믿음은 주저하면서도 주 앞에만 서는 것이다. 때론 쓰러지고 넘어져도 주님께만 도우심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세상 어디에 편입하고 합심하여 무슨 종교를 하나로 하고, 서로 화합하기를 말씀 전하는 일보다 우선한단 말인지….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그럴 때 어찌 하셨는가? 묵상하고 또 살펴 주가 행하심을 따라야 한다. 당시 바리새파니 사두개파니 하는 여러 파들을 하나로 모으려 애쓰시지 않았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대제사장, 서기관들과 어울리려 하지도 않으셨다. 구국의 일념으로 로마의 압제에 맞서 싸우지도 않으셨다.

 

세상은 언제나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우리로 강요하는데, 더욱이 교회가 비대해지고 회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애매한 중립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그런 오합지졸 같은 회중을 말씀으로 단단히 붙들어 하나 되게 해야 한다. 그러자니 현실 참여를 두고 말씀 외에 다른 쪽으로 우선하려 하다가 서로의 갈등 사이에 끼이거나 앞서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우리는 오직 부르신 자의 뜻에 합당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에 하나님은 증거를 보이신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삿 6:36-38).” 사사시대에 기드온의 이 유치한 요구에도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삿 6:39-40).”

 

얼마나 더 우린 주 앞에서 주저하며 주를 시험하려 들고 사는지,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왕하 20:8-10).” 이런 일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의 믿음 없음 앞에 치를 떨게 된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우리의 한계로 우린 주 앞에 엎드린다. 말도 안 되는 변명과 요구로 사투를 벌이다 어느 순간 주의 뜻 안에서 바로 서게 된다. 그러므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누가 어떻다, 하기보다 오늘의 ‘모세’가 내 안의 주저하는 나인 것을 인정하게 하신다. 성경은 엄히 말씀하시길,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사람들이 모이면 누구를 이해하고 어느 쪽을 설득하는 데 있어 그 자체로 정치화될 수밖에 없는 일이겠으나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우리의 교회는 말씀으로 단단하면 된다. 각자 저마다의 성향으로 이쪽으로든지 저쪽으로든지 기울 수는 있다 해도 그 안에서 주의 뜻을 온전히 세워가는 기본이 되면 다행이다. 덩달아 서로 위하느라 자칫 이 종교 저 종교 어쩌고 하면서 하나 되길 운운하다 똥인지 된장인지 말아먹기 십상이다.

 

분명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우린 주의 뜻에 따라 말씀으로만 하나 될 수 있기를. 서로의 성향이나 그 기질에 대해서는 각자의 몫이라, 백날 말로 가르친들 그 사람의 머리털 하나 나게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는 성령으로 저가 하나 되기를. 예수님도 주를 따르는 12명의 제자 가운데 가룟인 유다가 있음에도 그냥 두셨다. 일찌감치 저를 빠지게 할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도 그의 일을 하게 두셨다. 그 하나로 남은 11명을 바로 세우셨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1-12).”

 

바울의 이와 같은 설교에는 우리가 서로 다를 게 없는 죄인인 것을 그 배경에 전제로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결국 오늘 우리가 의롭다 하신 자로 세우심을 얻는 것은 우리가 어느 쪽이어서도 아니고, 어떤 일에 혁혁한 공적을 세워서도 아니다. 다만 주가 부르실 자를 부르셨고, 주가 세우실 자로 세우셨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8-20).”

 

자고로 사람은 무리지어 모일 때 사달이 난다. 교회 안에서도 말씀 외의 다른 일에 전념하다 다툼이 생긴다. 더러 동기들이나 동생의 사역 이야기를 듣다보면 여느 큰 교회란 그리하여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어느 교회처럼 거의 목사를 신봉하듯 저의 카리스마에 눌려 모든 성도가 맹목적으로 따를 때도 안타깝다. 아차, 하다 곁길로 들기 십상인 시절이다. 다만 주가 세우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그리하여 나는 주의하고 또 경계하는 것은 행여 나의 열심이 주의 뜻에 어그러져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 5:13).” 스스로의 믿음을 신념으로 알고 사는 이들은 주의할 것이다. 주가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출 4:8).”

 

이에,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17).”

 

앞서 저의 의지는 사소한 것이었으나,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20).”

 

다만 나아갈 뿐이다. 주의 말씀에 순종할 따름이다. 주저하고 숙소에 머물다 주의 진노 앞에 처할 수도 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24).” 결국은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31).” 주가 행하실 터,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이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1).

 

우린 다만 주를 찬송함으로,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1).

 

고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