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4. 9. 14. 01:43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출 5:17-1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8-9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배란, ‘게으르다, 게으르다.’ 이에 우리가 성도로 산다는 일은 영적 전투에 성실히 임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세가 당당히 말한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출 5:1).” 이 말을 저희가 순순히 들을 리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이에,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하루하루의 삶이 곧 전투 같다. 온갖 말과 말 사이에서 저마다의 생각이 부딪치고 그 주장이 각기 달라서 덧붙여 내가 뭐라 한들 누구라도 선뜻 들을 리 없다. 다들 자기 말만 들어달라고 하는 터에 어떤 말로도 저의 이해를 끌어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럴 때 오늘 모세 곁에 아론이 있듯이 또한 베드로와 요한처럼,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행 3:1, 4:13, 8:14).”

 

서로 같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바울과 실라와 같이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15:40-41).” 주의 놀라우신 권능으로 하나 되어 동역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그러므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뜻을 같이 하고 주 앞에 서로 같이 선다는 게 복이다. 나는 종종 누구보다 오랜 친구들이 같이 또 주를 사랑하는 자들로 하나 된 것을 축복이라 여긴다. 물론 여러 성도와 또는 주의 뜻을 같이 따르는 이들이 있으나 예전부터 나의 허물과 실수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이들이 오늘에 이르러는 주 앞에 같은 마음으로 설 수 있다는 게 은혜이다.

 

이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데 있어 곁에서 누구보다 나의 약함을 잘 아는 이가 날 위해 기도하며 서로의 대화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함께 불러 찬송하는 일이었으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나의 이 구원이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난 것이 아니었다.

 

고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것은 나의 생명에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주의 은혜로 이루러지는 일이어서, 이를 인정할 때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오늘 바로의 반응과 같이 갸우뚱거리며 우리의 예배를 이해할 리 없다.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출 5:17-18).”

 

어쩌면 오늘 저의 반응은 당연하다. 결국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0-13).”

 

그러니 억지로 될 일이 아니다, 설명하여 설득시킬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앞으로 전개될 재앙 때마다 끝끝내 인정할 수 없는 저들의 심정은 또 어떠할까? 결국 열 번째 재앙으로 가장 소중한 처음 난 것을 잃을 때의 극한 슬픔에서야 비로소 주를 인정하게 되는 일일 텐데,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우리가 오늘 주 안에 거한다함은 그로 인하여 은혜였다. 우린 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 16:29).” 곧 우리의 예배는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으로 주를 경외함은,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29:2).

 

이는 성도의 기본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 5:12-14).”

 

이에 오늘을 사는 데 있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할 때에 찬송과 경배가 나온다. 내일에 대한 염려는 내일에 맡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마치 일련의 상황에서 주가 원하시는 바, 교회는 반드시 주가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전기를 분리하는 공사에서 심지어 에어컨을 설치하는 일에 있어서도 주인이 선뜻 그 모든 것을 해준다고 해서 놀랐다. 어디 다른 곳을 알아보면서 서로 이번 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에 피하려고 할 때 주께서 또 이렇게 관여하셨다. 누가 물어서 그렇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심지어 어제 전기공사하는 이는 ‘주인이 왜요?’ 하고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그렇듯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서 언제부턴가 다툼을 피하고 서로의 반목을 주의한다. 여기는 교회라, 나는 또 목사라… 마치 나는 이를 약점인 것처럼 의식하며 내 기분대로 나서지 않을 때 주가 세우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들로 여기가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지 주가 알게 하신다. 설령 이를 악용하듯 들먹이는 것도 잘 안다. 가령 젊을 때 자신도 교회를 다녔다는 둥 그때 목사가 어쩌고, 교회가 어쩌고 하며 일부러 나 들으라는 식으로 떠버릴 때는 그 속내가 빤하다. 그래서도 그러려니 하고 만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교회니까, 또는 목사로서 저들의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손해보고 만다. 그런 걸 일일이 따진들 결국은 주의 이름을 들먹이며 뭐라 할 걸 생각하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그렇게 주께 맡기고 나는 뒤로 물러설 때, 우리 주님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교회를 지키시고 나를 돌보신다. 나로 주의 뜻만 바라게 하신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누구보다 베드로 사도가 이와 같이 전하는 것을 보면서 저의 성격과 그 자제를 아는 터라, 더욱 공감이 크다. 그리하여 우리는 애통하면서 온유한 자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4-5).” 그러할 때 위로와 오늘의 터 위에서 맡기신 바, 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7:35-36).

 

결국은 내가 맞서 싸울 것은 나 자신이었다. 늘 보면 내가 제일 어렵다. 혼자 돌아누워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로 억울함을 감출 때면 그야말로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또 깨닫고는 한다. 그러다 뜻하지 못한 결과로… 오늘 바로의 반응과 같이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하며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출 5:17-18).” 할 때의 난감함을 어찌할까?

 

이 일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21).” 하는 비난이 바로의 조롱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결국 우리는 그럴 때 주 앞에 아뢸 따름이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 세상 그 누가 서로 그 마음이 같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는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나의 것이 되기를.

 

이에 성경은 이르시길,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그러므로 한 번 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하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34:1).

 

이 놀라운 찬송이 실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하니, 그 수치심과 밀려드는 모멸감으로 치를 떨어도 모자랄 것인데,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2-3).

 

아, 언제쯤 되면 나도 이와 같이 주를 찬송할 수 있을까?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4).

 

이를 앎으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