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전봉석 2024. 9. 16. 00:4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출 7:3-4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7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 있어,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고하라.’ 하셨다(6:29). 이는 두려운 일로 선뜻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다. 바로가 어찌하지나 않을까, 서로의 관계가 흩어지지 않을까, 좋았던 사이가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그에 따른 염려가 먼저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명하시길,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이를 우리가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말씀에 그 답이 있다. 곧 바로가 그 마음이 완악하여지는 것까지 주가 그리 행하심이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7:3-4).” 이는 주가 이 모든 일의 주체이시다. 그리하시는 데 따른 이유가 있었다. 저의 완악함으로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6).”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하여 갸우뚱할 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일도 모르시는 게 없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 서로의 관계나 그 의미를 염려하거나 대비할 게 아니었다. 다만 말씀의 능력을 의지할 따름이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이를 붙들고 선다면 어떤 일이 닥쳐와도 그 일에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분별할 수 있을 거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여 어제는 우리가 모든 성경에 있어 그 인물 사건 배경에 대하여 오늘 나의 이야기로,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읽혀지고 드러나기를 바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가령 이스라엘의 주변국들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을 비롯하여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 당사자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들은 그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 그럼에도 듣게 하시는 것은 ‘들을 귀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이유이다.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 또한 세상에서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일이다. 오늘 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이는 세상의 권세 앞에 우리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닥친 현실을 두고 일희일비하지 아니한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우리에게 ‘천국의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단지 우리는 이 땅의 일로 식음을 전폐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이는 놀라운 능력으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그러할 때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당당히 전하고 저들 앞에 굽히지 않는다.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의연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에 우리의 부족함을 주가 채우신다. 모세 곁에 아론을 채우시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그러므로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34:9-10).

 

이 놀라운 사실을 알 때 우린 없어도 당당하고, 있어도 자만하지 아니한다. 여호와 우리 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 그에 따른 목적은 우리로 그 믿음의 단련을 위한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로써,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 처한 상황이 힘에 겨울지라도 이를 통하여 주가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실 것임을.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0-12).

 

이 원리를 알 때, 우리가 근심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게 하시는 이가 나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의 믿음은 굳건하여진다.

 

결국 오늘 본문에 열거되기 시작하는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말씀으로 순종하는 것이었다. 하여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6-7).” 오늘을 살면서 ‘다들 그러고 사는 일’에서 우리는 주의할 것이다. 서로가 ‘그러려니’ 하고 여기는 데서 실패와 좌절이 온다.

 

추석 연휴라 서울에 기거하는 아이가 주말에 본가에 왔고, 주일에 모처럼 예배당으로 나와서 같이 예배를 드렸다. 같이 식사를 하고 올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갔는데, 아이의 순종이 기특하기만 했다. 가령 추석 연휴라 수요일 오전에 하는 성경공부를 할 수 있겠나? 하고 물으니까 나만 괜찮다면 자신은 좋다고 하였다. 나야 괜찮고 말고가 아니라 그것이 나의 일이라,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는 평소처럼 그리하자고 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나서 오늘까지, 벌써 아이의 나이가 서른이라는 데서 놀랐다. 저의 순종이 저에게 두시는 불안과 공황이 발판인 것을 우리는 감사하였다.

 

견딜만한 정도로 주가 이를 두시는 데서 복이라 감사하였다. 결국 우리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심과 같이 저의 겸손과 순종은 저에게 두신 약함의 축복이었다. 이를 이제 서로가 안다. 요즘은 약을 어느 정도 먹는지, 생활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없는지… 서로가 공감하며 주를 인정할 수 있는 데서 축복이었다. 우리로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주의 말씀 앞에 설 수 있게 하시는 일이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어린 아이와 같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약함이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교만을 없이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이를 위하여 우리 안의 ‘바로’ 혹은 우리 밖의 ‘바로’를 때론 완악하게도 하신다. 이때에 우리는 확신한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나는 아이와 교제하며 저의 생활에서 어떤 감사와 간증을 가지고 사는지 물었다. 이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에 비례하여 감사와 찬송과 간증도 드려진다. 이를 알지 못하면 있는 것도 빼앗긴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나는 이 원리를 설명하며, 예전에 이를 모르고 살았을 때 나의 억울함과 노여움에 대하여, 그러나 오늘에는 이를 감사와 찬송으로 받을 때에 순간순간 주가 함께 하심에 대하여 열거하였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6).”

 

이 두렵고도 감사한 일에 대하여 아이가 공감하는 것은 어느 날, 전혀 그럴 리 없는 자신에게 공황이 찾아왔을 때 이를 우리는 같이 주를 경외함으로 인정하였고, 그리할 때 복이 되었던 것을 서로가 안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2-23).” 우린 이제 각자의 것으로 이를 축복이라 인정한다. 말씀이 필요한 삶이 되어 복되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19:8).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차츰 고통의 정도를 달리하시며, 바로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신다. ‘바로’는 그때마다 우리 자신도 이를 행할 수 있다는 데서 그 마음은 완악하여지는 것을 본다. 이에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이른 새벽, 눈을 뜨면 나는 교회로 온다. 말씀 앞에 앉히고 나의 생각과 생활을 글로 쓰면서 말씀으로 접근한다. 그러할 때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오늘의 이 모든 상황 속에 주가 주도하시고 역사하시는 뜻을 분별하게 하신다. 그러할 때에,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59:16-17).

 

할 때에,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36:5-6).

 

그러므로 내가 오늘도,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