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출 9:16-17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 38:21-22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이 겪는 여러 일들이 더러는 주의 말씀을 듣게 한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20-21).” 누구는 말씀을 마음에 두어 피할 수 있었고, 누구는 그대로 두어 피할 수 없었다.
우리가 전하는 이 일은 저들이 듣고 안 듣고의 여부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혹은 누가 듣고 돌이킬 수도 있는 일이어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와 같이 주신 상황 속에서 우리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9:1).” 바로는 듣지 않고 하나마나 한 소리 같은데 하나님은 외치라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6-17).”
곧 나의 직분, 나의 사명을 두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 일을 실천하는 데 있어 더러는 회의와 갈등이 지레 마음을 흩어놓기 일쑤다. 그럼에도 담대함으로 주 앞에 서는 일, 나는 공휴일이라거나 어떤 날도 다름이 없이 같은 동선을 따라 같은 시간의 흐름으로 움직인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어서 한 번의 예외는 이어져 다른 요구를 다시 하게 마련이다. 이에 바울 사도와 같이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1-2).”
이는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주가 더하시는 시간을 사는 일은 묵묵히 또한 무던하게 흘러간다. 주께 맡김으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 1:7).” 나의 마음에 확정한 것, 바로가 바로로 세움을 받은 데 따른 일은 악한 날에 악함으로 쓰시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출 9:16-17).”
그러니 주의 뜻에 합한 마음으로나 주의 뜻에 완고한 마음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로 주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에 우리의 할 일은 기도였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느 1:10-11).”
곧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단 9:20, 22).”
우린 이 모든 상황에서 주께 받은 지혜로 선다. 명절을 보내고 휴일을 나는 동안 다른 날과 같이 움직였다. ‘어떤 날’을 의식하여 살기보다 주의 뜻으로 사는 일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늘 같은 시간으로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서 이 모든 주인 되심이 주께 있음을 인정한다. 하여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 5:19).” 묵묵히 주신 날을 성실하게 사는 일에서 이를 주께 받은 선물로 여길 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그리하여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 62:10).
그저 묵묵하게, 아이는 연휴 끝 날인데도 성경 공부할 본문을 적어 보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 7:6-7).”
오늘 바로 앞에서 여러 번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가운데 모세의 심정을 헤아리다 아이가 적어 보낸 성경을 같이 묵상하게 된다.
주의 때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때요, 다시 사시는 부활의 때요, 승천하신 후에 다시 재림하실 그 때이다. 여기서 ‘내 때’란 말의 ‘때’는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시간을 가리킨다. 문맥적으로는 예수님의 수난 시기를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시기이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에 의해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이를 오늘 나의 시간의 척도로 삼고 살 수 있다면, 다시 더 분명해진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 우리가 사는 일에 하나님의 뜻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일심으로 산다면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떠나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삶이 아니라, 주의 시간을 좇고 그 활동반경을 고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중심이 우리 시간의 축이 되지 않을까? 우리의 그 어떤 삶의 행태로도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갖는다. 이때에 당하는 불이익에 대하여,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 7:7).”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우리 안의 갈등도 새삼스러울 게 아니고, 우리 곁의 안 믿는 자들 역시 우리로 이런저런 갈등을 조성하는 게 저들 일이다. 이는 엄연히 태초의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르신 말씀과 같아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와 같이 사탄과 악마에게 우리는 환자이고, 예수는 원수이다.
주의 뜻이 저들에게 거스르는 것은 당연하여서, 우리도 주의 자녀로 사는 동안, 살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악한 영으로부터도 항상 그 대적이 되게 돼 있다. 오늘 바로와 애굽에 있어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듯이….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
그런 가운데 아이의 마음에 말씀을 같이 나누며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을 기억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기적이며 은혜였다. 아이의 그러한 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책임을 느낀다. ‘아픈 아이’ 역시 하루 중 어느 때에 꼭 하루에 한 장씩 성경을 필사하는 일에 대하여 나는 그리 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6-37).”
다들 우리는 같은 날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이를 직접적으로 느끼면서 내가 입으로 시인하며 살 수 있다는 게 복이었다. 가끔은 나의 이 시간과 이와 같은 모습이 아이와 아무개에게 본이 되고 덕이 될 것을 의식하기도 한다. 나란히 같이 하는 사무실 사람과 더러는 의견이 맞지 않아도 저가 의식하는 ‘교회나 목사’를 생각하며 행여 나로 인하여 주의 이름이 가리워질까 하여 의식하는 것과 같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알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누구보다 주의 사랑과 그 은혜를 아는 자로서 취하게 되는 행동거지와 말씨는 주의하게 된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주를 바라며 산다는 일,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38:1).
두려워할 줄 알 때 은총도 구할 수 있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7-8).
주께 아뢰며,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9).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5).
오늘도 이와 같이 주께 바람이여,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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