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전봉석 2024. 9. 19. 02:5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출 10:1-2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우리로 주가 하신 일을 깨닫게 하신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데 따른 이유와 목적을 알리신다. 저들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고, 우리 후손들로 하여금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살피게 하신다.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의 일이고, 어둠의 자식으로 지낼 때에 주가 행하신 은총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하여 우리는 주의 사랑이 내가 사랑하기 전, 하나님을 바로 알거나 믿지도 않을 때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시었다. 주의 사랑이 놀라워서 우리는 뒤늦게 탄식하고 부끄러워하며 나의 죄인 됨을 주 앞에 고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이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뜨겁다. 예전에 내가 마처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을 더 사랑할 때, 주의 사랑을 하찮은 듯 멀리하고 소홀히 여기고 살 때에도 주는 나의 보호자셨고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안다. 그때 그 사람, 혹은 그 상황이 그래서 그랬던 것이구나! 하고 놀라움으로 주 앞에 더 엎드리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돌아보면 은혜 아니었던 것이 없다. 그야말로 나는….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욥 20:20-21).”

 

채울 수 없는 육신의 욕망과 영혼의 허기를 달래려고 얼마나 세상을 향해 구애하며 살았었는지… 돈과 사랑과 명예를 좇아 사람들을 따랐고 주를 멀리하였다. 나의 판단과 이성을 우선하였고, 누군가의 권면과 기도를 가소로운 듯 멀리하며 살았다. 그때에도,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8-39).

 

아, 그때 그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죽어 마땅하였을 죄인이고 어디에서도 부끄러워서 얼굴조차 들고 다닐 수 없었을 텐데….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잠 11:5).” 가끔 누가 예전의 나를 돌아보며 그립지 아니한가? 하고 물을 때 일체 그때의 나를 그리워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주를 멀리하고 살던 날들이 모두 어리석었고 부끄러운 일 뿐이어서…. 오늘의 어떤 상황도 예전의 나를 돌아보며 그리워하게 하지 못한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6-7).”

 

오늘에 이르러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앉는 것으로 은혜이다. 어제 아침,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며 이와 같은 고백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한때는 나의 나 된 것으로 이를 어찌 무마할까 하여 기를 쓰고 살았고, 그러는 게 삶을 바로 사는 것이라 여겨 육신이 원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행복추구권’을 운운하며 그게 삶의 가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 12:25).”

 

두려워할 줄 알고 사모할 줄 아는 주의 이름으로 복되다. 우리가 같이 말씀을 나누며 서로를 축복하고 주의 은총으로 찬송하는 오늘이 가장 귀하였다. 하여 더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추석 명절이라 처가의 조카아이들이 각각 사귀는 여자와 그에 따른 결혼 계획을 얘기하는데 일체 저들이 믿는 가정인지, 믿는 배우자인지, 그런 데에 관심이 없어 안타까웠다. 아이들이야 안 믿는 경우라 그럴 수 있다지만 손위처남도 장모도 누구 하나 저들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 우려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아서 답답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갈 길이 먼 것인지, 돌아올 길이 없는 것인지…. 나는 속으로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감사한 일은 저들이 돌아가고 딸애가 사귀는 아이에 대해 우리끼리도 이야기할 때 우리의 관심은 저쪽 가정형편이 어떤지, 학벌이나 문벌은 어떤지 전혀 물을 것도 없이, 부모는 믿는 분들이신지… 상대 아이의 신앙은 어떠한지… 어른들은 모두 믿는 가정들인데 다음 세대에는 대부분 믿음이 멀어져서 지금 사귀는 아이가 이번 명절부터 가정예배를 인도한다는 소리에 나는 속으로 됐다, 하고 더는 따질 것도 없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우리의 자랑은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 앞에 나아오기를 기뻐하는 일이다. 저마다 서로를 말할 때 학벌이나 문벌을 자랑하고 지금의 형편과 그 사정을 두고 가늠하지만… 우리는 세상이 어떠한지, 곧 있을 주의 날이 어떠할지, 이에 두려워할 줄 알고 미리 이를 살핀다. 세상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 같아서,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 56:10-12).”

 

그런데도 저들의 오늘 사정이 낫고 먹고 사는 데 부요한 것 같아 부러워하는 일은 우리 영혼을 미끄러지게 할 따름이다. 시편은 이에,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2-3).

 

어찌 아니 그럴 수 있겠나? 오늘에서 보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그야말로 뭘 해도 돈을 벌고, 어찌 살든지 잘만 사는 것 같아서 하나님 없이도 그 한 생이 남부러울 것 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같은데….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19-20).

 

아, 이보다 더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어느 가까운 날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오금이 저린다. 지금은 나 역시 주를 온전히 믿고, 나름 주 안에서 주의 권능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데… 어느 날에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까 하여…. 하여 바울 사도 역시 늘 주 앞에 설 때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었다. 천국을 사모하는 삶이란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로 사는 일이다. 정작 우리가 주를 사랑함은 주의 공의하심 앞에 자신을 경계할 수 있는 자로 세우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바로는 당장의 일에 결정을 미루었다. 백성들이 오죽하면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출 10:7).” 하고 아뢰어도 저는 이를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없었다.

 

이에,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26:4-5).

 

이제 더는 그 어떤 부귀영화가 주어진다 해도, 세상 그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하나님을 바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귀하거나 우선할 수 없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20).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27).” 우리 주님이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심을 알 때,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39:1).

 

무심결에 주의 뜻을 멀리할까 하여,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4-5).

 

우리 생은 고작 그것이 전부일 뿐인데,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러므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