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출 12:51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2
430년의 시간이 지나고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다. 70인이 들어갔다가 장정만 60만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키게 하신다. 그 달 14일 저녁에 흠 없고 일 년 된 어린 양 수컷을 잡아 그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을 함께 먹게 하신다.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먹어야 한다. 유월절 구원의 때는 어린 양의 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옛 삶과 단절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러므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이로써,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왜 다들 멀쩡하게 잘 사는데 이래야 하는가? 하는 데 따른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가졌다. 구원의 감격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오늘 2절에서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곧 우리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새로운 날의 시작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는 앞서 우리의 삶과 오늘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다른가 알게 하신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15).”
이 놀라운 날의 새로움이 날마다 우리의 날에 속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17).”
전에 알던 나의 삶과 오늘의 나의 삶은 다르다. 이를 오늘 성경은 다시금 일깨우신다. 하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중요한 것은 지난 430년 애굽에서의 생활이 아니라 오늘의 삶이다. 우리의 구원은 유일하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다른 이름으로도 구원이 있다는 정신 나간 교회와 화합이 세상적으로 호응을 받고 있는 이때에 우리로서는 다른 이름을 아는 바 없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 예수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다. 이를 앎으로 오늘 우리는 저마다의 제사장으로 주 앞에 선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사 61:6).”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일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하여 언제라도 주 앞에 담대히 나아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아뢴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하여 우리는 저마다의 유월절을 기념하고 이를 기억하며 산다. 옛 생활을 돌아보아 주 앞에 통회하며 오늘에 부여하신 새 삶을 감사하고 찬송한다. 예전에 내가 미처 주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살 때를 생각할 때면 나의 죄로 인하여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절절하게 감사한다. 어제도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며 나는 저에게 할 수 있는 한 새로이 몸에 밴 거룩한 습관을 저버리지 않기를 부탁하였다. 내달 쯤 제자반 성경공부가 끝나면 새벽예배를 조금 줄일까 한다 하기에 한 말이다.
내가 이처럼 기를 쓰고 묵상글을 쓰고 새벽 시간을 잃지 않으려 하는 데 있어 한두 번 허용하다 쉬 타협하고 돌아서는 게 나의 속성이라, 나는 하루 중에 이 시간을 목숨 걸고 사수한다. 이로써 한 날의 여러 곳에서 수시로 나는 나의 묵상글을 되새기며 다시 꺼내 읽으며 더도 덜도 말고 묵상글을 쓸 때의 감격으로 살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새벽예배를 지킨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더더욱 그동안의 훈련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좀 빠지면서 해야겠다고 하니, 말이 그렇지 그러다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갈까 하여서이다.
우린 누구나 자신을 자신해서는 안 된다. 다니엘은 이에 ‘마음을 정하였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예수께서 우릴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바울은 이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여기에는 그 어떤 타협의 여지가 없다. 종교화합을 운운하고 타종교와 화해를 하고, 토속신앙에도 구원이 있다는 둥 사회구원이 어떻고 하며, 저마다의 이상과 신념으로 한 자리에 모여 대회를 하는 데 있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우리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룰 수 있는 구원이었다면 이와 같이 유월절의 역사는 의미가 없다. 예수의 보혈은 허상이 된다. 우리가 더는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사는 일에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9-10).”
오늘 8절 말씀에서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하심은 우리의 생명 양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더는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고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3-4).” 더욱이 예전에 즐기던 그 어떤 죄의 모양도 버려야 한다.
힘드니까 하는 소리겠거니, 생각하지만 나는 친구에게 할 수만 있으면 누가 몇 명이 오든지 남들은 하든지 아니 하든지 그런 데 마음 쓰지 말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집중하기를 바랐다. 추석 연휴 끝날 수요예배에 갔더니 교역자들 가족을 포함해서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이 모여 앉아 예배를 드렸다고 했다. 거기에 자신과 아내와 아이를 빼면 몇 명 되지 않은 터라, 허탄하게 웃는 저에게 그러니 그 얼마나 큰 복이냐! 하고 반문하듯 감격하였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게 저의 회의와 갈등이었다.
우리가 남을 보고 신앙을 지킬 것인가.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저는 자꾸 예전 생활을 놓지 못하고 새 삶을 같이 병행하려 한다. 친구 몇 명이 있는데 설과 추석 명절 날 때는 한 번씩 만나 술을 한 잔씩 하며 그간의 회포를 푼다. 이는 버리기 싫은 즐거운 일이다. 올해도 결국 그 자리에 나갔다. 추석 제사를 지내는 일에서도 결국 형님께 말하지 못하고 그래왔던 것처럼 차례를 지냈다. 그러니 이런 일을 두고 내가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으로 권하는데도 쉽지가 않다. 몸에 밴 옛 생활이란 게 그토록 끈질기고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4-5).”
곧 새로운 나로 살기 위해 우린 우리 몸에 밴 애굽을 떨쳐내야 한다. 유월절을 기념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심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약함을 아심이다. 새벽예배를 하다 한두 번 빠질 수는 있으나 작정을 하고 서너 번만 나가겠다고 하는 것과는 처음 그 마음가짐이 다르다. 설마, 하고 생각하는 일이 너무 쉽게 우리를 지배한다. 한두 번 허용하다 어느새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다. 이를 일러 자자손손 기념하게 하시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바울은 왜 항상 기회 있을 때마다 다짐하고 또 결단하였는지 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저로서 그만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스스로를 다잡는 까닭은 우리의 약함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날마다 나는 그리하여 억지로라도 이 시간을 사수한다. 강박이든, 병적이든,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누가 또 보든 안 보든 그 또한 상관이 없다. 나로서는 이 시간을 나의 한 날의 중심으로 하여 기를 쓰고 이 시간을 지킴으로 시시로 다시 읽기도 하고, 이로써 한 날의 수고를 집약한다. 주와 함께 하는 것은 말씀으로였다. 이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오늘 말씀에서 왜 이처럼 유월절을 지키라 하시는지를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나의 약함을 인정하게 된다. 친구에게도 한두 번 허용하게 되는 것이 슬그머니 주객이 전도되어 도로 안 하는 날들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다니엘도 예수님도 습관을 좇아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일과를 지키셨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시 37:27-28).
내 안의 속성이 악에 가까워서 늘 나의 게으름과 또한 거짓됨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불쑥, 나를 지배하는 것을 본다. 바울의 절규와 같이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17).” 이는 내남없이 다를 게 없어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다시 다짐하고 또한 결단하는 날들로 오늘을 사는 일에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
날마다 매순간 주 앞에서 깨어있는 자로 사는 일이란, 나의 작은 습관이 나의 인격이 된다. 나의 영적인 습관이 몸에 밸 때 날마다 주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 수 있다. 안 믿는 친구들과 모여 명절 때면 술 한 잔 하는 즐거움을 뭐라 하겠나? 돈독한 형님의 뜻을 거스르느니 평소 하던 대로 그냥 차례를 지내고 제사를 하는 일이 뭐가 그리 나쁘다고 하겠나? 그러는 동안 공격당하는 것은 나의 ‘출애굽’이다. 어느 날 문득 ‘나의 유월절’을 잊고 살지도 모른다.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구원의 감격도 없이 교회를 출입하고 믿노라, 하는 관성에 따른 신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다시 한 번 오늘 이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41:2).
하여 오늘도,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4).
옛 생활은 언젠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9).
할 때에,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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