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전봉석 2024. 9. 27. 02:02

 

네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 네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출 18:23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 47:6-7

 

 

우리의 목마른 광야 르비딤에서 아말렉을 상대하여 싸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이를 데리로 왔다. 모세는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었고, 이드로는 이방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으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곧 모세는 그의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었다. 성경은 이를 오늘 우리에게도 이르시되,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그러므로 우리 삶이란 주가 보내신 바,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그러할 때 우리에게는 철저한 자기부정이 따른다. 모세는 일찍이 사명을 수행하러 애굽으로 들어오면서 아내와 두 아들을 장인 이드로에게 돌려보내었다. 곧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걸림이 될까 하여 그리 조처한 것이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7-38).” 내가 우선하는 일에 주의 일을 앞에 두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여,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이는 말씀을 수행하는 데 있어 행여 내가 우선하게 되는 것이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닐 때가 있다. 그래서도 예수님은 이르시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이를 바울은 후에 증거하기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였고, 앞서 예수님이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하신 말씀에도 합당한 것이다.

 

사실 이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감히 이를 우상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해도 하나님보다 우선하게 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된다. 더러는 가족이 혹은 자기 자신이 그러하여서 이를 위하여 먼저 주의 뜻을 구하기보다 이를 바랄 때가 있다. 그렇다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건강이나 생활을 내팽개치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그러므로 가족이나 자신이나 이 또한 내게 부여하신 주의 일이라, 그 사명을 감당하듯이 돌보고 위하는 것이야 중요하다. 자칫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서도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4-6).”

 

다만 위하되 우선하지 않고, 섬기되 주의 뜻보다 앞서지 않게,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 2:5).” 보면 늘 어떤 일을 두고 씨름하는 것이 가족 일이거나 자신 때문이다. 어제도 친구는 시력이 나빠지는 일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큰 병원을 찾았고, 달리 어떤 방법이 없다는 소식에 의기소침하여 전화를 했다. 그런 중에도 나는 가급적이면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하나둘 고칠 수 없는 것이 늘어가고, 앓는 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것이 생겨난다. 이를 건사하며 주시는 날까지 바르게 사는 것도 귀한 일이어서 그럼에도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에 감사가 이어져야 한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안에 주를 모시고 사는 자의 특권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린 나그네요 행인과 같으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16).”

 

곧 우리에게는 예비 된 곳,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다. 더 이상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이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8-49).” 고로 우리가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살 때,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나는 이를 친구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나 자신에게도 되뇌인 것이다. 연이어 병원을 다니고 주사치료를 이어가면서도 고통을 호소해야 하는 입장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의 고단함을 새삼 느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다소 낙심한 듯 기도를 할까 한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이를 격려하며 우리의 기도가 매순간 드려지는 찬송이고 주를 인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남들보다 연약한 우리의 육신으로, 그럼에도 주가 맡기신 바, 한 날의 수고에 충성하며 주의 말씀에 충일하게 살아간다는 일에서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그러므로 나는 늘 암송하며 새 힘을 얻는 것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늘 내 안에 말씀을 중심으로 두고 산다는 일은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시는 데 따른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는 주의 말씀 앞에 나를 붙들어두기 위함이다. 며칠째 진통제까지 곁들여 맞으면서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그리하여 우리의 육신은 점점 낡아지나 우리의 영혼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문득 누구의 슬픔을 위로하는 데 있어 나의 고통이 한몫을 한다. 나로 저 한 영혼을 사랑하는 데 있어 내 마음의 진정성은 그 일이 내 일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나의 신앙의 발판이 되어 누구는 더러 나의 연약함을 두고 안타까워하나 나는 이것으로 주 앞에 간절할 수 있다. 어제 친구에게도 말하길, 우리의 기도가 간절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남들과 달리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어릴 적 나의 부친이 나의 약함을 두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말해주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더욱 더 주의 도우심으로만 살게 되는 일이었으니.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보면 내 곁에서 누구보다 간절하게 그러므로 성실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는 이들은 남모를 고통과 아픔을 견뎌내며 살고 있다. 세상은 이를 두고 혀를 끌끌 찰 테지만,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하여 감히 말하지만 나는 나의 고통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랑한다. 기뻐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로 얻는 위로의 은혜가 크다. 그것으로 나는 이처럼 말씀 앞으로 나를 앉힌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하는 시인의 고백은 앞서 저의 고백과 같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2-3).

 

살면서 어찌 누구나 평안함이나 안락함을 원하지 않을까? 하나 이를 위하여 기를 쓰고 이것에 전념하는 일은 어리석다. 건강은 물론 물질에 대하여도 주식이니 무슨 투자니 할 때 그것으로 죄를 짓지 않기를, 하여 눈 뜨기 무섭게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보다 주식시장을 살피고 어디 부동산 시세를 살피는 데 혈안이 되어서는 어렵지 않겠나? 시인과 같이 자칫 그러다 우리는 미끄러지고 넘어진다. 남들 부러워할 거 없다. 세상 일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처럼 좋지만은 않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러므로 오늘도 무엇으로 우선하고 내 마음을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 것인지…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이는 주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니,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하여 가난해도, 육신이 연약하여도,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은 하나여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여 오늘 이 모든 일에서 주를 찬송하고 나의 삶이 곧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할 때, 우리 삶은 성경을 이루려 함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6, 12, 14).”

 

이에,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47:1-2).

 

나는 오늘도 말씀 앞에서 찬양으로 하루를 연다. 그리하게 하심을 귀히 여겨 주께 감사한다. 점심께 친구와 말씀을 나눌 때, 이를 두고 나는 기도하며 주가 내게 할 말씀을 넣어주시기를 바란다. 그렇듯이 나의 한 날의 수고는 족하였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5-6).

 

이로써,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