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전봉석 2024. 9. 25. 02:24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출 16:31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시 45:10-11

 

 

우리는 수시로 원망하고 원망할 때면 옛일을 과장하여 회상한다. 기억의 오류인지 현실의 부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노예로 살던 그 시절이 설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그러기야 하였을까? 오늘의 원망은 책임을 전가하고, 이는 모세를 향한 것인지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우리의 자세는 뚜렷해진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당장의 현상이나 현실에 직면한 문제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이와 같은 바울의 태도에서 나는 어찌할 것인지 생각한다. 일시적인 어려움으로 육체의 것을 추구하며 과거를 회상하여 거짓으로 기억을 조작하며 그리워할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바라며 달려갈 것인지. 결국은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현실을 뛰어 넘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던 일처럼,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 14:23).”

 

믿기 어려운 장래의 일인가, 이미 지나쳐온 부풀려진 과거의 일인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하는 것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와 같이 마음으로, 또한 영으로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그에 따른 지식과 함께,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그러므로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전하여서 늘 같은 데를 바라보듯 그리워하다 오늘도 백성들은 먹을 것을 두고 원망한다. 이에 하나님은 저들의 원망과 불평까지도 선으로 바꾸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우리의 끼니를 채우시었다. 그런 중에도 말씀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욕심을 더해서 가져가다 썩게 만드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출 16:16).”

 

그렇게 순종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17-18).”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음을 안다. 그런데도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19-20).” 그러니 그때마다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나는 이 짧고도 명료한 말씀 앞에서 자주 멈춘다. 과연 나의 지금 이 생각은, 어떤 관심은 무엇을 향하고 어디를 바라보고 서있는 것인지? 결국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이 확실하고 놀라운 말씀 앞에서 나는 과연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지 영의 일을 사모하는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살면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이와 같이 어찌 아니 그리할 수 있을까? 하여 날마다 애통해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 바라는 온유한 자로 서게 하신다. 그럴 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주를 온전히 사모하기를 바랄 때, 나의 영혼을 거스르는 육신의 정욕을 하나씩 이겨내는 삶이 필요하였다. 살면서 삶에 대한 욕심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 62:10).

 

오늘도 말씀 앞에 가만히 앉힌다. 그러할 때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바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사는 것으로 족하였다. 더러는 좀 더 풍성하여지기를 원하나 그 일로 내가 선택하게 되는 것들이 무엇일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 38:41).”

 

하물며,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이를 보다 명료하게 되새기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내가 하려고 할 때 주가 멈추신다. 내가 80%를 바동거리면 하나님은 20%만 일하신다. 엊그제 누구와의 통화에서도 우리의 자유의지란 그와 같은 책임과 의무를 지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할 수 있는 선택하기도 하다. 100%다 주께 맡기면 주가 다 책임지신다. 그러할 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일과 쉼의 순간을 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일은 쉼의 날로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레 23:3).” 주신 오늘의 소득으로도 주의 것으로 예비할 때 전부를 감사하는 일이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하나님은 손수 자신을 시험해보라 하실 정도로 이 축복의 통로는 확실하였다. 그런데도 우린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겨 시간도 물질도 나의 판단과 기준도 나의 주도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착각한다. 고작 그 확신이 요즘은 너무 쉽게 정당화되어 이혼도 쉽고 신앙을 저버리는 일도 쉽다. 그런 가운데 시편의 세계는 우리 자신을 종으로 놓을 때 복이 있음을 알게 한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9:11-13).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27:9).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31:16).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34:22).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종노릇하지 않는다. 돌아온 탕자와 같이 아버지 집의 종으로나 쓰임받기를 바라나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 놀라운 주의 은혜로 산다. 더는 주저하지 않고 주 앞에 엎드려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누구보다 하나님을 친밀하고 친숙하게 신뢰하고 의지한다.

 

그리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고백이 나의 것이 되기까지 주를 신뢰한다. 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이 놀라운 시편의 삶을 산다. 시편으로 살길 원한다. 더러는 투덜거리나 거리낌 없이 주 앞에 아뢰고, 더러는 감사와 찬송을 올리다가 또한 금세 원망과 불평의 마음으로 미끄러져 주 앞에 고하고 또 아뢰며 주님께만 내 마음을 아뢸 때,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123:1-2).

 

오직 주의 은혜를 기다리며 사는 일은 마치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 같이 평안하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2).

 

이를 위하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오늘에 두신 상활 속에서 묵묵히 또한 무던하게 주만 바라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이상하지? 주를 바라면 바랄수록 주 앞에 설 때에 내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어서 참 기쁘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이제 이 말씀을 나를 붙들어 앉힐 때, 어떤 일이 마음이 요동을 칠 때, 가만히 속으로 되뇌며 평안을 얻는다. 내가 더는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란 사실 앞에서 나는 얼마나 감사하고 또 다행한 일인지! 주의 것이면 잘하든지 못하든지 주가 책임지실 것이다. 나의 자유의지란 한낱 감상에 지나지 않아서 나는 이제 더는 그것을 운운하지 않는다.

 

그리할 때에,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45:10-11).

 

비록 가나안 여인 ‘다말’이었다 해도,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었다 해도, 모압 여인 ‘룻’이었다 해도….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