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전봉석 2024. 9. 24. 03:2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2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 44:26

 

 

홍해를 건너 하나님의 구원으로 찬송이 울려난다.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는 주를 찬송한다. 자신의 이해와 상식을 들이대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 자신을 두고 송구해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 27:6).

 

가끔은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거나 이를 설명하다보면 어떤 벽에 가로막히는 듯하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나 역시 이를 어찌 말로다 설명하기 어려워서 말은 장황하여지고 설명은 두서없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땅의 언어로는 다 기록할 수도 정확히 묘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71:8).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은 모르시는 바가 없다면 그게 어찌 자유의지인가? 하는 질문에 솔직히 나는 저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고, 며느리 다말에게서 얻은 자식으로 예수님의 계대를 이은 일에 있어서도… 앞서 저들이 동생 요셉을 애굽으로 팔았던 것에 대해서나… 저들은 그리 선택하여 악을 저질렀으나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셨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는 우리의 의지조차 주가 더하시는 은혜로써 가능하였다. 이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믿는 자라 할 수 있는 증거는 막연하거나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그리 여겨지고 느껴지는 자부심에서 확신을 갖는다. 오늘 2절에서 ‘나’, ‘내’ 하는 1인칭 표현으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그러니 이와 같은 고백이 아무나의 것일 수 있겠나? 나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을 설명하다 저의 이해하지 못함을 두고 뭐라 더 설명해야 할지 막연하였다. 다만 오늘 이 말씀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할 때 나의 그와 같은 고백을 주관적인 것으로 이를 상대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할 때 나만 그리 느낄 수 있는 감사를 어찌 말로다 객관화할 수 있겠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2).

 

곧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여서 이를 누군가에게 설며하여 말로다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나 역시 어찌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고 이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지 알 수 없는데,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와 같은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데 따른 그 모든 섭리를 우린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19-20).”

 

나는 저의 이해 못함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데 저는 자신의 이해 못함을 두고 오히려 하나님이 다 아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니, 어찌 그런 발상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한 마디로 교만일 텐데, 자신이 이해하는 정도만 인정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럴 때 저의 한계는 늘 감사가 막연하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뜨거울 리 없다. 그저 그럴 수 있는 문제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63:7).

 

이를 저에게 말로다 이해시킬 능력이 내게는 없다.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사 45:24-25).” 이 자랑을 그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에 대하여 나도 나조차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리 사랑하심을 받는지 알 길이 없는데 하물며 이를 누구에게 설명하기란!

 

하나님의 크신 권능 앞에 우리의 교만은 얼마나 초라하고 가소로운지… 오늘 4절,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4-5).” 이를 어찌 경험하고도 믿기지 않는 일일 텐데,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잠 3:34-35).”

 

우리가 주를 안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교만함이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101:5).

 

그런데 우린 우리의 한 치 앞도 모르는 오늘을 살면서 마치 모든 날을 다 아는 것처럼 이해하려 드니 그것이 어리석을 뿐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렘 50:31).” 곧 ‘우리가 안다’ 하는 것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는 것은 모두 다 자기 기준에서의 판단으로 어리석다. 자신의 교만으로 굽힐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6:18, 18:12).”

 

교만이란 나의 이해와 판단으로 규정하려는 자기의지다. 그와 같은 자유의지에 따른 결과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이를 알 때 우린 주를 인정하는 데서 몸부림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누구에게 한껏 설명하는데 저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는지 투덜거렸다.

 

나도 나에게 보이는 것을 저에게 들려주고 싶다. 내가 듣는 것을 저에게 보여주고 싶다. 하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 각자의 것이 되기까지,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3-15).”

 

스스로 알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을 붙들고자 할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 영혼을 타는 목마름에 두신다. 곧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생각은 헛될 뿐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48:14).

 

하여,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욥 5:12-14).”

 

차라리 저가 가진 지식이 또한 그의 이해와 상식이 덜 배우고 모자란 중에 부끄러움을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누구는 자신들의 학식과 자신들이 읽은 여러 권의 서적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경계한다. 다 알지 못함으로 겸손한 것이 아니라, 라틴어를 비롯하여 당시의 아람어나 헬라어 또는 그때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 성경도 원어를 들고 서로 연구한다. 저들 마음에는 본 교회가 가르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여긴다. 번역된 한글 성경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다고 한다. 듣다듣다 나는 저의 지식이 저를 삼켰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만 먼 타인으로 친절할 뿐이다. 말씀으로 권면할 수 없는 현실과 상황에 대하여 나는 난감하다. 주의 은혜를 말하려는데 저는 자신의 이해 밖의 현상을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것은 누가 누굴 위해 대신 기도를 받고, 그와 같은 영매를 두어 같이 성경을 나누는 데 있어 ‘어떤 이’의 환상이나 그 풀이에 더 귀를 기울인다. 나야말로 저들의 행태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보다 성경을 바로 알고자 한다면서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어떤 어린아이의 기도’에 따라 앞으로의 일을 결정한다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실상은 우리의 고백이 참으로 단순하고 순진하다.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대상 17:20).” 자신이 어떤 신보다 우선되는 시대를 살면서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8).”

 

그리하여,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89:6).

 

저마다의 신앙일 때 순간 감사와 찬송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출 15:23-24).” 당장의 현실에서 우리가 원망할 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25).”

 

열 가지 은혜보다 한 가지 고통으로 감사보다 원망이 앞서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결국 우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주의 은총을 알 길도, 이를 받아낼 능력도 없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사 49:8).”

 

누구와의 통화에서 저에게 성경을 풀어주다 저의 억지스러운 꼬투리에 말문이 막힌 뒤 마음이 내내 좋지 않았다. 서로의 말을 다시 복귀하고 어디서 설명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하다 지켰다. 그럴 때 아이가 문자를 남겼다.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요 11:34-37).” 이에 나는 문득 생각하기를, 우리는 현상을 보고 성경은 하나님의 다음 이야기를 보여준다.

 

나사로의 죽음은 우리에게 끝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는 시작이다. 마르다도 마리아도 ‘만일 ~하셨더라면’ 하고 가정법으로 전능하신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엉뚱하게 자신들의 판단으로 말한다. 오라버나 나사로는 죽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으시고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 자, 이제 어쩔 것인가? 그대로 무덤에 있을 텐데, 말씀대로 일어나 나올 텐가?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 죽은 줄 알았으나 순종할 때 살아서 돌아온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44:3).

 

이를 알 때에,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