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전봉석 2024. 9. 26. 02:14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 17:15-16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0

 

 

오전 일찍 자동차 리콜에 따른 수리 때문에 공업사로 갔다. 작업시간이 길어서 노트북을 들고 가서 설교원고를 작성했다. 전날에 맞은 주사치료로 몸살이 난 것처럼 온 몸이 아팠다. 마침 친구가 전화를 하여 우리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점심께 차를 수리하고 집으로 갔다. 병원에 들러 진통제를 맞았다. 마치 하루 동안에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한 것처럼 온 몸이 피로하였다.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때로는 참 피곤하다.

 

그런 가운데 영적 기갈을 이겨내게 하시려고 나의 하루 곳곳에 르비딤을 두시는 것 같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출 17:1).” 그런 와중에 말씀을 준비하고, 또 누구에게는 말씀을 설명하면서도 나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하루가 힘에 부친다. 경직된 근육에 주사를 하여 몸살기가 있을 수 있다고 의사는 말하고 그 몸에 또 진통제 주사를 찔렀다. 주를 전하던 입으로 고단한 나의 하루를 두고 투덜대기도 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영적 기갈은 다양하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듣는다는 일은 스며져서 깃드는 것으로 습관이 인격이 되듯 생활이 말씀이 될 텐데, 머리로는 알겠다. 마음으로는 따르지 못하고, 말로는 설명하겠다. 그러나 실제의 삶으로는 씨름뿐이다.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는 일도 내게 두신 일이라, 나는 친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말했고, 저는 ‘그런 일로 성령을 구하냐?’ 하며 되물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이는 교만의 문제다. 오늘은 그 말을 꼭 해줘야겠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으로 목마른 사슴 같이 갈구하는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일은 적당할 때는 알 수 없다.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다른 데 등 비빌 게 있으면 알 수 없다. 그만한 일로 성령을 구해야 하나? 하고 묻는 친구의 반문이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았고, 아! 하고 어떤 이해와 깨달음으로 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 순간은 할 말을 잃었으나, 그래서였구나! 하는 어떤 이해가 퍼뜩, 스칠 때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 같다. 아무리 친구라도 선뜻 하기 어려운 말을 두고 주 앞에 먼저 물을 시간을 벌었다. 또한 그것으로 나의 나 됨을 돌아보게도 하였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살면서 우리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영적 기갈을 느껴는 것은 정상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여러 굴곡진 시간을 지나게도 하신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36:8).

 

기갈로 인해 타는 갈증을 느낄 때 주의 복락의 강물이 절실하다. 때로는 나의 연약한 육신으로 이를 안다. 어찌 감당하지 못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절실히 느낀다. 또는 뜻하지 않은 어려움으로 신음하다 주 앞에 토해낸다. 이와 같은 나의 약함이 복이 된다. 하여 바울의 고백에 나도 아멘, 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여,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여건이 오히려 주를 바라게 한다. 바울 사도의 고백이 나의 것이 되기까지, 나로도 주를 인정하게 하시려고 오늘의 ‘르비딤’에서 원망을 하거나 주의 이름을 부르거나 주는 내 곁에 함께 하신다. 그렇게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두시고 알게 하신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자, 이제 무엇을 따를 것인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에 주가 더하시는 생수를 마실 것인지, 나의 판단과 그 기준을 따를 것인지. 살면서 드는 불평과 원망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는 일이어서 자유의지로 자유의지 그 자체를 주 앞에 내어드릴 수도 있다. 나의 선택조차도 주께 맡김으로 원망을 멀리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의아해하듯 ‘그런 일로 성령을 구해야 해?’ 하는 친구의 질문이 내내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우리는 그렇듯 자기 의지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다보니 말 속에 가시가 있고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러,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감사가 비면 원망이 채워진다. 일반적으로 뇌까리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 감사하지 물론 하면서도 뒤이어 나오는 여러 불평이 우리 영혼의 기갈을 가중시킨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37:8).

 

성경 번역이 어떻고, 어떤 교단이 어떻고, 누가 무슨 말을 하고… 하면서 정작 말씀 선포는 없고 역설만 난무한 세상이다. 우리로서는 기도밖에 없다. 나는 나의 약함을 두고 구하다가 이로 인하여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란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17).” 우리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신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말씀 속에 길이 있다. 시편을 살아야 한다. 아침 일찍 공업사로 가야 한다는 그 자체로 나는 긴장하였다. 10분 거리를 한 시간 전부터 서둘러서 출근길이라 피한다고 피하여서 일찍 도착하기까지… 병원에서도 주사를 맞는 일보다 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공포스러워서 긴장하고 있는 나 자신을 두고 쩔쩔맬 때… 친구의 엉뚱하면서도 순진한 질문 앞에서 오히려 말문이 막혀서 할 말을 못하고 있을 때,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그럼 우린 무얼 구할 것인가? 무얼 찾고 있는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우리가 구하는 것이 비록 나의 연약한 몸을 두고 아뢰어 마음은 더욱 어렵고 힘든 것 같으나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으로 나는 위로가 크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씀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듯…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나로 인내할 수 있는 영을 부어주신다. 이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그리하여 당장은 이해가 어렵고 마음은 불편하여 나의 입에서 말씀이 선포되었다가 투덜거리며 원망도 일삼고는 하지만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나의 연약한 육신으로 아픈 것도 일이라,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서너 시간 걸리는 작업을 기다리며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몇 시간째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전날에 맞은 주사가 오히려 몸살처럼 힘들게 한 모양이다. 그러니 앉으면 허리가 아프고, 서면 무릎이 아프고, 누으면 목이 아프고… 아픈 게 일이라는 말, 이것도 사명이라면 사명일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 누구의 전화를 받고 저의 물음에 말씀을 선포하고 설명하는 일이라니!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말씀이 전하여질 때 하는 이나 듣는 이나 주의 뜻 안에서 온전하여져 잃어버린 감사를 할 수 있을 것일 테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롬 9:28).”

 

나는 나의 사소한 일상에서 주의 행하심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확신한다. 어디가 어떻게 아플 때 거기가 왜 아픈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고, 그런 가운데 주께 바라는 것이 나의 간구이었다가 주의 뜻을 바라게 된다. 곧 그런 와중에 ‘아말렉’과 싸움이 나고, 나는 손을 뻗어 주의 역사하심을 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나의 누추한 하루 중에 주를 바라고 찾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 복이었다. 하루가 마치 전쟁 같아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2-13).” 이를 단순히 그럴 수 있는 우연한 일로 치부할 게 아니었다. 모든 게 주의 섭리 가운데 내게 부여하신 사명이며, 내게 허락하신 역사이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그 마음이 황망할 때, 돼도 않는 시므이가 따라오며 저주할 때 다윗은 얼마든지 화풀이 하듯 저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주가 그리하심으로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 16:7).” 할 때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10).” 이것으로도 주를 인정할 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그리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오히려 나의 오늘이 부여하는 어떤 불편함이나 고통 가운데 고단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복되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기도가 가능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6:1-3).

 

나의 하루가 아무리 요지경이라 해도,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5).

 

그러므로 나는 서둘러 주 앞으로 나온다. 말씀 앞에 먼저 앉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확신한다.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 하신 말씀만으로 굳게 선다. 그러할 때,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0).

 

나의 이 한 날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시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