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06 주일
이사야 18장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사 18:1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사 18:2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
사 18:7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
들어가는 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사 18:7).”
오늘 ‘구스’는 앗수르의 침공을 앞두고, 유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다. 우린 늘 이와 같이 염려와 두려움으로 이를 방어하듯 산다. 그래서도 자못 거짓을 곁에 두고 산다. 거짓은 다양한 때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현실을 회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할 때에 더욱 그러하다. 처음 죄가 들어왔을 때 아담도 하와도 자신들의 잘못을 ‘남 탓’을 하며 돌렸다.
거짓의 특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거짓으로 앞선 거짓을 덮는다. 그러다보니 거짓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어김없다. 이를 이사야는 앞서 5장에서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하고, 거짓에 거짓을 더하여 거짓의 수레를 끌 정도인 것에 대하여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18-19).” 자가당착에 빠진 경우다.
거짓은 허황된 풍설에 기대거나 이를 떠벌이며 전파한다. 거짓을 다른 거짓으로 덮는 것이다. 하여 성경은 이르시길,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풍설’은 떠도는 말로 요즘같이 온갖 미디어가 난무한 때에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진짜보다 진짜같이 과장하거나 은폐하고, 서로 이를 주워들은 사람들은 말을 더하며 다수를 형성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다수주의를 따라 민심에 출렁거리는데, 민심은 오락가락하는 바람 같고, 그때 다수의 정의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다. 하여,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2).” 말씀은 일갈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 19:5).” 또한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12:22).” 그러므로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1-12).”
가령 다수주의에 따른 악행의 예로 다수의 백성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아론에게 요구하자,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 하였다(출 32:1-6). 우리 영혼을 좀먹는 우상이란 이와 같이 다수의 욕구에 따라 좌지우지 된다. 아론의 얼토당토않은 ‘남 탓’은, “이 백성의 악함을…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출 32:22-24).”
본문이해
지난주일 우리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는 ‘다메섹’에 대한 경고에서 ‘보라’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사 17:1).” 그와 같은 우리의 거짓된 자아는 ‘무너진 무더기’ 같다. 이번 주일 ‘구스’에 대한 권면의 말씀도 같은 의미에서 살필 수 있다.
‘다메섹’은 유다의 북쪽에 위치했고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늘 ‘구스’는 유다의 남쪽에 위치한 주변국으로 여섯 번째 경고의 대상이 된다. 그동안 바벨론을 위시하여 다섯 번의 예언에서 주로 책망과 저주와 멸망에 대한 선포였다면 오늘 이어지는 구스에 대한 예언은 ‘유다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저들에게 보이시며, 저들로 돌이켜 믿음 안으로 들어오도록 권면하고 있다.
첫 구절에서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하고 시작할 때(1), 이미 끝 소절에서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 하는 말씀을 짧고도 굵게 전파하고 있다(7). 오늘 본문은,
첫째, 구스에 대한 충고(1-2)
둘째, 구스를 공격하려는 앗수르의 파멸에 대한 예언(3-6)
셋째, 여호와 앞에 굴복하게 될 구스의 미래(7)
이를 토대로 오늘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7).” 하고, 주변을 밝히는 빛과 저들에게 그리스도의 맛을 내는 소금으로 그 사명이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유일하신 사랑의 빛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사 18:1).”
오늘 우리의 현상은 다들 그 속에 화가 가득하다. ‘남 탓’을 하고, 저마다 자신의 죄의 실상을 남에게 전가시켜 보복한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묻지마 폭력’에 노출된 상태다. 그 실체도 없는 허상은 점점 더 악랄하고 폭압적이다. 힘의 논리로 살육이 난무한 정글 같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이르시길,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도,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이에,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출 23:4-5).”
2. 우리를 지배하려는 환경적 요인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사 18:2).”
앞서 잠깐 지리적 배경으로 구스의 위치를 설명하였고, 역사적 배경으로는 애굽의 남쪽에 위치한 아프리카의 국가로, 주전 20세기에 국가로 형성되었는데 주전 715년경에 애굽을 통치할 정도로 강성하였다. 오늘 이사야가 구스를 향하여 예언하는 시기는 구스가 애굽의 제 25대 왕조를 건립하고 전역을 다스리던 중이었다. 이때 앗수르의 산헤립은 북이스라엘과 다메섹을 정복한 후 1, 2차에 걸쳐 유다를 침공하던 때이다(왕하 18:19 이하 참고). 이에 애굽을 지배하던 구스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유다가 정복당하면 인접해 있는 자신들도 곧 침공을 당할 위기에서 회친을 구하러 왔다.
즉 구스는 자국의 군대를 소집하고, 주변국들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결성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구스에서 온 사신들은 갈대배를 타고 유다를 방문하였다.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사 18:2).” 이는 저들이 유다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3.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사 18:3).”
이사야는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한다(왕하 19:35-37). 아울러 구스가 유다에 예물을 바치게 될 것을 알린다(대하 32:23).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도 이를 나타내는데,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사 18:7).”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
결국 오늘 본문은 구스를 향한 심판의 경고라기보다 앗수르를 향한 철저한 심판의 경고다. 이를 구스인들이 듣고 ‘일시적으로나마’ 변화하여 그 영향을 받을 것을 서술한다. 그러나 결국 구스에 대한 파멸의 예언은 이사야 20장에 가서 구체화된다!
나가는 말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5-26).”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오셨다. 이 성경은 모두 계시의 언어다. 계시는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하여 열어 보이시는 예언이다. 이와 같은 말씀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 2:6-8).”
그러므로 오늘 중에 누구라도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메섹과 구스와 애굽과 바벨론과 앗수르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결국 저들의 멸망을 통한 하나님의 공의를 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영혼구원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있고, 우리 육신의 정욕에 따른 인생의 파국은 그 잘난 자유의지의 선택의 몫이다.
궁극적으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자, 이와 같은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살 것인지, 세상을 좇으며 저들과 같이 살 것인지… 오늘도 우리 안의 ‘구스’에게 선포하신다.
부디 우리 스스로가 저들과 다르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저들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하심뿐이다. 그 은혜로 살 뿐이다. 이에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 산의 독수리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던져 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여름을 지내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겨울을 지내리라 하셨음이라(5-6).”
하시는 말씀 앞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4).” 하며,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한 과정이란 사실을 알고, 분명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7).”
결국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끄는 18만 5천의 군사를 몰살시키심으로 앗수르의 위험에서 다윗의 집, 유다와 남쪽 나라들을 건져내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이는 히스기야 시절의 일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여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 것으로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하는 비극을 가져왔고,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다(대하 32:20-23).”
결국,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사 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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