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출 35:1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 64:9
말씀을 전하는 일과 이를 삶으로 살아내는 일은 다르다. 비록 나의 삶이 전하여진 말씀에 미치지 못할 때는 항상 송구하고 때로는 죄의식이 들 때도 있다. 가령 어렵고 힘들 때 주를 바라고 의지함으로 새 힘을 얻기를, 말씀을 따라 전해놓고는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실의에 젖을 때는 또 다른 중압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의연하게 주를 바라며 바로 서길 바라는데 마음은 저 혼자 의기소침하거나 우울할 때는 자칫 죄의식이 들 때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하시는 말씀으로 충성을 다하길 바라나 마음과 생각은 그러한데 실제 삶은 그렇지 못해서 부끄러울 때도 있다. 그러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하시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삶을 되새긴다.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주 앞에서 늘 이중적이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면서도 그것으로 또한 낙심하기도 한다.
내 몸이 시달리다보면 마음을 헤아려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이 어렵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도 일주일에 한 번 인생의 리듬 같이 오는 주일이라, 말씀을 전하는 나와 이를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나는 동시에 세워진다. 말씀을 선포하다 그 말씀을 누구보다 내가 먼저 들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주를 인정할 때, 나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더러는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감사하면서도 서럽고 서러운데도 은혜인 것을 아는 터라,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겔 20:12).”
한 주간 나의 삶이 주일을 기점으로 하여 리듬을 타는 듯 마무리 되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이에 주의 일이란 주신 날들의 총체 같아서 어느 한 날이면서 동시에 한 주간이 모여져 주일, 이 한 날을 완성한다. 그때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마치 나의 날들은 근근이 하루씩 모여서 한 주간이 되어 주일로 한 묶음씩 한 마디가 되고 한 소절이 되는 것 같다. 집 앞 병원이 주일에도 문을 여는 곳이라 예배 끝나고 들러 진통제를 맞고 산보를 하듯 한가로웠다. 금세 비라도 올 것 같이 무거운 하늘이라, 바람도 을씨년스럽게 불어 춥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사람 같아서 나의 하루는 단조롭고 나의 한 주간은 늘 제자리 걸음인듯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이러한 나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상이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함께 하심을 따라 산다. 이렇게 또 주일을 지나 월요일 이른 새벽에 교회로 나오면서 나의 날들은 같은 패턴을 유지하려는 원심력이 있는 것 같다. 더러는 마음이 또는 육신이 서로를 견제하듯 힘들 때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도는 것이다. 더 자라는 아내의 말에 잠시 뒤척이다 늘 그렇듯 교회로 올라왔다. 딱히 어떤 병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늘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함으로 마음이 시달리는 것인지, 몸이 고달픈 것인지… 병원에서는 따로 나을 게 아니라, 오늘은 이만한 것으로 적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책상에 앉아 말씀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러다 어디가 불편하면 일어서거나 도로 앉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때로 나 때문에 쩔쩔매는 일이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런 가운데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신 16:17).” 하면 나는 아픈 것이 일인 사람이라, 그런 가운데서 누굴 대하고 어떤 일을 처리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또 이렇게 이른 아침인지 늦은 저녁인지, 주 앞에 나아와 말씀을 읽고 나의 일상을 돌아보며 주께 되묻듯 힘들어한다.
나의 일생에 무엇으로 자원하여 드릴 수 있을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 12:43).”
나의 전부란 이와 같아서 드릴 것도 없는데 이것이 전부라, 오늘도 주사치료가 예약이 돼 있는데 그런들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아서 굳이 이걸 계속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런 것으로 마음을 쓰다 주께 아뢰는 나의 기도가 또한 마음이 늘 보면 이것뿐이라 송구할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내가 주께 내어드릴 것이 이것이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과연 나는 즐겨내는 마음으로 나의 연약함도 받아내며 살고 있는지…. 늘 이렇듯 어디가 힘든 게 나의 일이라,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고작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로 시달리며 사는 일에서 나는 주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하는 소릴 들을 수 있을까? 더러는 가족들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마는 일이라, 나는 혼자서 씨름하듯 몸을 뉘었다 일으켜서 주 앞으로 나온다. 하여 이 일도 주의 은사라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하여 어느 아이가 무엇으로 고통을 호소할 때 더러는 누가 골치 아픈 일로 심지어는 애물단지 같이 여길 때면 아이 또한 아픈 것이라고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나로서도 무얼 어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서 서로가 끌끌, 혀를 차는 것으로 외면을 한다. 나는 가끔 ‘아픈 것도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 누가 겪는 어떤 일에서 혹은 그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깊은 한숨처럼 주의 이름을 부른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난쟁이 친구’가 모처럼 안부를 묻듯 잘 지내는지 묻고는 구구절절 적어 보낸 하소연이 내내 명치끝에 걸린 듯 답답하였다. 뭐라 위로의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두고 며칠씩 답을 하지 못하다, ‘기도할게 힘내라’ 하고 적어 보낸 말이 또 명치끝에 걸려 답답하기만 하였다.
아, 우리가 받은 은사란 게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와 같이 아프고 병들어 구걸하는 게 전부라면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으로 저의 한 날의 시작이며 끝이고, 한 주간의 리듬으로 그저 단조로울 뿐이라 해도,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내가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느 4:16-20).”
누구는 싸우고 누구는 성을 지키고, 나팔을 불거나 건축을 하거나… 주어진 상황에서 묵묵히 또한 주신 삶을 다하는 일이어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그저 다만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겨 나머지 무엇이든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면서 무던하다는 것….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심으로 나는 나의 아픈 것도 일이라, 이를 은사로 여김은 그것으로 누굴 사랑하고 나의 날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내는 일이었으니.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 21:3-4).” 나의 전부라는 게 고작 별 것 아닌 듯하나, 어떤 날은 그냥 앉아 있는 일도 혹은 서성거리는 일도 이래저래 고달픈 것이나 충성되이 또 한 날을 채워내는 하루하루의 리듬 같아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하여 나는 부지런히 교회로 온다. 돼도 않는 묵상글이라 해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설교원고라 해도, 주일 하루 말씀을 전하는 이로 나의 한 주간은 시작이고 끝이 나는 일이어서. 나는 나의 부족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어느 아이의 고달픈 심정을 헤아린다. 이제 열 살, 무엇이 저로 그토록 혼란스럽게 하여 한 움큼의 안정제와 진정제를 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글쓰기를 해주면 안 되겠나? 하고 아내가 넌지시 부탁하는데 나는 엄두가 나질 않아서… 상대적으로 두 살 터울의 형아 아이는 또 어쩌면 좋을지? 그 마음에 울분을 참다못해 책을 찢거나 방문을 주먹으로 쳐서 구멍을 내기도 했다는데…. 아, 주님!
우리로서는 아픈 것도 일이라, 더러는 마음이 혹은 육신이 서로가 어찌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서 그저 다만 사는 게 일이 되는 삶을 앞에 두고…. ‘기도할게 힘내라’ 하고 며칠 씨름하다 보낸 답이 서운하였는지 ‘난쟁이 친구’는 달리 답이 없고, 이런저런 사연의 아이들을 어찌 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는 속으로 혼자서 기도 중이라고 변명처럼 생각하면서 미루고 있다. 늘 내 코가 석 자라, 주의 은혜 앞에서도 염치가 없는 마음이라….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9).”
나는 무엇으로 본이 될까? 그저 주 앞에 나아와 엎드릴 뿐이어서,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6-8).” 의기소침하여 말도 못하면서 마음에 얹혀 떨어낼 수도 없는 일을 두고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어서.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출 35:29).”
오늘 말씀 가운데 누군 드리고, 누군 그것으로 일을 맡아하고, 서로는 서로에게 각자의 몫으로 그 쓰임을 다하는 것일 테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나는 부디 그러한지.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 10:34).”
하여 나는 ‘아이’가 남다르게 아파하는 것도 일이고, ‘난쟁이 친구’의 남모를 고단한 삶도 주가 맡기신 은사여서 부디 우리 일생에 꿈이 있다면…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그저 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 혹은 누구의 어떤 일로 마음만 어려워서 눈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전부였다 해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가만히 또는 그렇게 부자의 집 앞에서 헌데를 앓고 구걸을 하는 게 전부였다 해도, 그의 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게 전부였어도,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 64:1).
주께 아뢰는 일 그러할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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