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전봉석 2024. 10. 17. 01:57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출 38:8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 67:7

 

 

물두멍은 성막에 봉사하러 들어가기 전, 번제단에서 제사 의식을 행하기 전에 먼저 손발을 씻기 위한 일종의 세면대이다. 이를 만든 재료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이었다. 이 여인들의 역할은 절기 때마다 춤을 추고 찬양하는 여인들이다. 그 기원은 아론의 누이, 그녀를 선지자로 일컬었는데 미리암으로,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출 15:20-21).”

 

여기서 이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로 레위 지파 자손이었을 것이다. “레위인은 이같이 할지니 곧 이십오 세 이상으로는 회막에 들어가서 복무하고 봉사할 것이요(민 8:24).” 그들은 회막에서 청소를 하거나 예배를 준비하는 자들로 그들의 거울로 물두멍을 만들도록 헌물한 것은 그들 자신이 단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막을 단장하고, 하나님을 더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말씀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8-39).” 하는 것인데, 여인들이 자신을 꾸미기 위한 거울을 포기하고 주의 성막에서 물두멍을 만드는데 그 재료로 드린 것으로 우리가 자신보다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를 더 우선하는 데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는 말씀으로까지 연결이 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였다는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우선하여 생각하기는 그만큼의 자기희생이 뒷받침 된다. 곧 먼저 자신을 돌보거나 그 마음의 소욕을 채우는 일보다 교회를 위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데 있어 기꺼이 ‘자신을 치장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우선한다. 그리고 여기서 거울은 더 확장하여,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신 말씀으로도 연결이 되어 더러는 우리가 서로를 보며 하나님을 연상하고, 우리의 ‘착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부분적이나 후에는 이 모든 게 온전할 것이다.

 

물두멍의 역할은 그와 같이 우리가 주 앞에 설 때 먼저 손발을 씻듯 죄를 고백하며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찬양으로,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출 30:18-20).” 하신 말씀에서 그 놋이 이 여인들의 거울이었다.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주를 바라고 섬길 때, 우선하여 자신을 우선 깨끗이 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였다. 예배에 앞서 곡조 있는 기도와 같이 찬양으로 주 앞에 드려지는 마음은 그와 같다. 이처럼 번제단을 만들고(1-7), 물두멍을 두고(8), 성소를 규정하는 포장 울타리를 세웠다(9-20). 그리고 성소의 외부 기물이 제작되고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남에 따라 지금까지 소요된 경비를 계산하고, 그 중간보고를 기록하는 것(21-31) 역시 주 앞에서 청념과 청빈한 삶을 연관 짓게 한다. 특히 교회 재정은 자칫 투명성을 잃을 때 혼탁하여,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눅 16:14).” 하는 말씀으로도 스스로의 자정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 본문에서 번제단에는 각종 기물들이 쓰였다.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등으로 “제단의 모든 기구 곧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고… 제단 양쪽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메게 하였으며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었더라(38:3-7).” 이 번제단은 피의 제사를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그 희생을 태워드리는 곳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의 처소이다. 그런 가운데 이곳을 상상하면 조금만 소홀해도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그러므로 항상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제사 이후에 늘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장소이었다.

 

예배 후에 성도의 교제나 교감이 서로의 일상에 따라 중요한 것과 같다. 그저 친밀한 타인으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고통을 남 얘기하듯 불구경한다면 예배의 실천은 바라기 어렵다. 하여 오늘 더욱 눈길이 간 것은 물두멍이다. 성전의 여러 기물들의 재료와 달리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어졌고 그것은 찬양하는 여인들, 곧 찬양 사역자의 거울로 만들어졌다는 데서 깊은 묵상이 따른다. 그 까닭은 많은 제물을 죽이고 쪼개고 태우는 곳으로, 그 열기 또한 능히 견뎌야 하는 번제단에 앞서 놋거울의 특성상 잠시만 방심해도 얼룩이 진다. 자신의 모습을 비출 수 없다. 우리가 이를 상상해볼 때,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레 4:5-12).”

 

이에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막에 봉사하러 들어가기 전 그리고 번제단에서 제사를 집례하기 전에 먼저 정결하게 손발을 씻는 일과 이를 마친 후 씻는 장소이다.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했듯이 우리는 먼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동시에 그것으로 산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자신의 죄를 항상 고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회개하는 기도와 찬양이 선행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런데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하여 오늘 물두멍 제작에 담긴 의미를 깊이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보면 성막의 다른 성물과 달리 물두멍에 관한 제작 규례는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그 크기가 몇 치나 되는지도 알 수 없고 장식이나 형태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으셨다. 다만 찬양하는 ‘여인들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거울을 녹여서 만들었다는 데서 그 의미는 더 확산되고 의미는 다양해지는 것이다. 곧 우리 삶의 성결은 제한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앞서 성막을 지을 헌물이 남아 돌 정도로 많이 들어왔다는 것을 우린 잘 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36:5).” 그렇다고 저들이 애굽을 급히 나와 광야에서 서로의 물자가 남아돌았던 것이 아니다. 식량과 물이 항상 부족하여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하던 처지에 저들에게 풍요란 물질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곧 영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마음의 산물이었다. 그런 가운데 여인들의 놋거울은 마음과 정성을 다한 드려짐의 결정적인 단면이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그런 가운데서의 성도의 넉넉함이란 세상이 알 수 없는 풍요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온전한 헌신과 무한한 축복의 결정이다. 이를 지키는 데 있어 성막 뜰과 울타리를 설치하였다(9-20). 성막 본체 및 지성소와 성소의 기구에 이어 성막 뜰에 배치될 기구들이 완성된 후(1-8) 브살렐과 그 조력자들은 성막 뜰과 외부를 구분할 울타리 포장과 기둥 받침들을 만들었다(27:9-19).

 

성막 뜰은 길이와 너비는 넓고 평평했다. 성막 뜰 안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일반인들도 들어갈 정도였다. 한편 이곳에 성막과 물두멍, 번제단이 위치해 있고 이런 특정한 기물이 있는 곳 외의 나머지 장소에서 제사장들이 제사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 곧 제물을 잡거나 하나님께 바쳐졌던 제물을 먹었다. 즉 이 성막 뜰은 처절한 죽음이 있는 동시에 아름다운 화목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예수의 성품으로 사역을 감당할 때, 그 품은 넉넉하면서 복잡하다. 모두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품성을 요구한다. 이는 결국 예수님의 품과 같아서, 우리의 죄를 위해 처절하게 십자가에 달려 온 몸의 피를 다 쏟으며 죽임을 당하셨다. 바울 사도는 이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하였고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하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결국은 성막 뜰과 같이 우리들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서로 화목하게 하시려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이에 모든 것은 예수를 지칭하고 저를 묘사하며 의미하는 데 있어 초점을 맞추게 한다. 성막 내외부 각종 기물과 함께 성막 뜰과 울타리까지 모두 제작한 후에 보니, 곳곳이 다 주를 상징하고 의미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또한 주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고 주의 뜰 안에서 먼저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나아가 성도와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한다. 이에 따르는 투명한 재정은 서로가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올바른 쓰임과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데 주의하게 하신다.

 

곧 우리의 쓰임은 주가 쓰시는 데 따른 필요한 정도에서이고 그러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남아돌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채우시고 입히신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 이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하나 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이는 결국 말씀에 따른 순종으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10).”

 

하여,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5-6).”

 

결국,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1-2).

 

그러할 때,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