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전봉석 2024. 10. 21. 01:56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레 2:11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시 71:8-9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교회’나 사람을 보고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드리는 시간과 마음과 물질과 생각은 순수한 영혼으로 가능하였다. 이를 오늘 말씀은 ‘고운 가루’로 곡식을 곱게 빻아 만든 가루로 의미한다. 우리의 육의 생각과 동기로는 이를 이해할 수 없고 가르쳐 알게 할 수도 없다. 아담에게 물으시자 아담은 하와를 탓하고 하와는 뱀을 탓하였다. 그들은 말 앞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그 원인을 돌렸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이와 같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이를 우린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 서로가 어찌 도울 수 없다. 어제는 뜻하지 않게 예배 끝나고 아파트 안의 라운지에서 손위처남내외와 장모를 모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나는 모처럼 다 같이 마주하는 것이라 서로의 근황을 묻다, 형님댁이 자신들 다니는 교회의 큰 규모와 그에 따른 어려운 마음을 토로하였다. 곧 그 크고 부유한 교회는 사실 여러 시설이 잘 돼 있고 복지도 좋고, 사람들 사이에서 굳이 서로 친밀하지 않아도 되어 좋다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문득 드는 생각이 비록 별 거 아니지만 자신이 꼭 이런 큰 교회를 다니며 헌금을 내고 시간과 마음을 쏟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큰 교회여서 혹은 작은 교회여서가 아니라 우리는 주 앞에 드려지는 것이고 이에 ‘고운 가루’와 같이 자신을 곱게 빻아 주 앞에 올리는 순수한 동기가 필요하였다. 이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1).” 하고 오늘 시작되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자신을 가루 내어 그 고운 가루로 치대고 뭉쳐 빚어져야 한다.

 

그러는데 있어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11).” 누룩은 발효시켜 부풀리고 꿀은 입에 달다. 누룩이나 꿀을 첨가시키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킨 것은,

 

첫째, 누룩이나 꿀은 모두 발효성을 지닌다. 누룩은 성경에서 자주 죄와 사악과 교만과 위선을 빗대어 설명할 때 비유로 쓰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 16:6, 12).”

 

하여,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5-7).”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둘째, 꿀은 세상적이고 육욕적인 안락이나 쾌락을 설명할 때 쓰였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잠 5:3).”

 

그러므로 누룩이나 꿀은 그 속성상 거룩하신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예물에 융합시킬 수 없었다.

 

셋째, 누룩이나 꿀은 당시 이방인들의 제사 제물에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제물과 구별시켜 소제에 소금을 넣어 사용하게 하셨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이를 어제 나누었던 대화로 다시 가져가 보면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가지는 일에 있어 스스로들 자신의 의지나 선택으로 자주적인 입장을 취한다. 굳이 바라거나 구하여 간구하게 없다고 하였다. 지금 이 정도로 적당히 감사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우리의 절박함은 삶에 있어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그것으로 주밖에 의지할 수 없고 기도 외에는 다른 수가 없을 때 복이라고 하였다. 가령 저이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왜 잃은 한 마리를 찾으러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래서 당신을 찾으셨다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수긍하는 것 같지 않았고, 그것은 오늘의 삶이 적당하여서 이만하면 됐다는 자기만족의 경우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곧 오늘의 그에 따른 적당함이 은혜인 것을. 하여 나름은 교회를 선택하여 자신들의 뜻에 따라 간 것 같으나 그 또한 주의 은혜로인 것을 나는 어찌 설명해야 할지 머뭇거리다 말했다.

 

큰 교회 수천 명의 성도들이 있겠으나 작고 부족하나 한 영혼으로 온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교회도 있다고 말하였다. 나의 목회는 그러하였고 우리의 사역은 더러 자신의 연약함을 돌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가령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의 경우처럼 저는 다만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거지로, 헌데를 앓는 환자로, 평생을 가난하고 궁핍하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연명하며 살았을 뿐이나 그의 사역은 그 어떤 사역보다 귀하였다.

 

손위처남은 공공신학의 개념을 물었고, 나는 생소한 것이나 잘은 모르겠으나 개괄적으로 우리가 외치는 사회구원은 오늘 날 모든 종교가 외치며 화합을 꾀하려하는 강조점이란 사실을 말하였다. 이에 그 중심에 로마가톨릭이 있어서 선을 구하고 의를 행함으로 온 인류공여에 이바지 하는 것으로 종교의 취지를 변색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고치시며 함께 하셨지만 이를 위해 오신 목적이 아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굳이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것으로 그 목적이었다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보다 로마에 맞서고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의 부정부패와 맞서 싸워야 했다. 자신을 드러내어 유대로 갔더라면 역사적으로 그 어떤 영웅보다 더욱 더 이름을 떨치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 바라다 유다는 자괴감이 들어 배신하고 자살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다소 뜬금없고 막연하여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늘나라를 외치시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다들 저마다의 이상과 이유와 목적과 꿈을 가지고 주께로 나아오지만 정작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곧 우리의 구원이 현실을 살며 오늘의 난제를 풀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나라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이를 어느 관점으로 바라느냐 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해가 가능하고 수긍과 순응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에,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이것은 결코 사회구원을 운운하며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인류애의 발원으로가 아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 3:8).”

 

같이 대화하고 말씀을 나눌 때 말하기보다 듣기가 열 배 더 에너지를 소모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저의 영혼을 주께 아뢰는 일이 백 배는 더 힘들다. 중구난방 돌아가며 나오는 난맥의 대화에서는 가만히 듣는 것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 그래도 모처럼 가진 자리에서 ‘이번 주 할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며 아내가 수고했다며 웃었다. 주의 영으로가 아니면 이런저런 대화의 고리는 풀리지 않는다. 각자 그 삶의 절구통에 자신을 넣어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찧고 빻고 그러기를 수차례 거듭하여야 비로소 가능할 일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나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모두 사역자로 자신의 생을 사는 그 일 자체가 주의 사명을 다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교회를 운운하고 그 규모나 교회의 비전을 운운하기보다, 즉 공공구원이 아니라 개인구원으로 성경은 철저하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개별적이면서 개체적으로 관계하신다. 그런 가운데 우리로 하나 되게 하심인데,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그리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

 

서로 하나 됨은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그러므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3).” 이를 강조함은 우리의 존재 이유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만남이었는데, 아내는 좋았는지 매주일 혹은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이러한 자리를 만들자고 보채듯 말하였다. 주의 뜻이면 주가 행하실 것이다. 다만 우리로서는 ‘유향’을 넣어야 하는데, 우리에게서 나는 냄새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누구에게 어떠한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다.

 

다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와 같이 시간을 같이 하는 일도 주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이와 같이 우리의 한 날, 한 생은 궁극적으로 주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시 71:2).

 

하여,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3).

 

이에,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6).

 

그러함으로,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9, 12).

 

이는,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7-18).

 

고로 나의 기도는 한 가지,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