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전봉석 2024. 10. 23. 01:53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불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레 4:21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 73:26

 

 

오늘은 속죄제에 대한 내용으로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 규례이다. 곧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이 사함을 얻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드리고 싶은 사람만 드리는 자원제가 아니라 죄를 지은 자는 누구나,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이다. 규례에 따라 제물을 달리하는 제사들과 달리 신분에 따라 다르며 특히 오늘은 제사장의 속죄제 규례를 언급하고 있다.

 

의무제인 속죄제는 네 가지 등급으로 구분된다. 우선은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1-12), 이스라엘 회중이 범죄한 경우(13-21), 족장이 범죄한 경우(22-26), 평민이 범죄한 경우(27-35) 등에 따라 제물의 종류와 처리 방법이 달랐다. 이처럼 달리 적용된 이유는 장차 전 인류의 죄를 완전히 또한 단번에 그리고 영원토록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는 더 크고 값지며 완전한 제물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히 9:13-14, 23).”

 

곧 속죄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를 예표한다. 이를 알아보고 세례요한은 일러,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하였고, 바울은 덧붙여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에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예수님은 처형당하심으로 대속 사역을 수행하셨다. 이로써 우리는,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히 10:8).”

 

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렇듯 어느 것 하나 말씀은 소홀할 수 없다. 오늘 2절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누구라도 죄에서 자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오늘도 이처럼 주 앞에 먼저 올라와 말씀 앞에 앉히시는 주의 은혜가 귀하다. 그럴 수 있는 육신의 건강과 마음을 허락하심이다. 더욱이 오늘도 아이가 출근전 같이 나누길 원하는 말씀 두 구절을 보내왔는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먼저 “성령이… 못하게 하시거늘” 할 때, 성령이 어떠한 방법으로 누구에게 뜻을 전했는지, 이 글의 저자인 누가는 언급하지 않았다. 누가의 관심은 그 사실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성령이 주시는 마음으로는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거나 하는 직접적인 것과 그와 같은 마음을 수시로 더하시는 간접적인 경우도 있다.

 

그 원인은 주변 환경 때문으로 유대인의 반대가 있어서 계획을 변경했을 수도 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은 바울이 보낸 갈라디아서가 북 갈라디아에 보내진 것인지, 행정구역상 갈라디아주 전체가 아니라 갈라디아의 브루기아 지방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든지, 일반적으로 브루기아 방언과 켈트 방언을 모두 들을 수 있는 로마의 갈라디아주 남쪽 내륙의 브루기아 지방에 인접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인지 해석이 분분하다.

 

하여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두 지역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바울 일행이 페시누스, 앙키라, 다비움에 이르는 북 갈라디아 전역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으리라 보며, 그래서 나중에 그곳으로 <갈라디아서>를 써 보내게 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리학상으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누가의 서술만으로는 바울의 행적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 일행이 아시아의 본래 선교 목적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갔다는 것이며, 또한 그 여행이 아시아의 동쪽 경계선으로부터 소아시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무시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소아시아로부터 드로아에 이르는 전도 여행 경로를 보여준다.

 

성경을 통해 바울이 이곳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보에 의해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비두니아 곧 소아시아 북서부 지방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하고 있는데, 6-10절을 통해 성령으로부터 예수의 영을 거쳐 하나님으로 용어가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6-10).”

 

이는 곧 초대교회의 원초적인 삼위일체 신앙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을 통해 어떻게 복음의 진로를 안내하시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다음 구절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행 18:5-7).”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내로부터 내려왔다.’ 바울은 고대하던 두 명의 사역자를 만났다. 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거나 아니면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먼저 도착하고 그 후에 실라가 빌립보에서 도착했을 것이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신앙 생활에 열중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살전 3:6).”

 

한편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는 섭섭한 소식도 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4:13, 5:11).”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이에 대장을 썼는데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혼란에 빠진 것을 염두에 두고 두 번째 서신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였다.

 

한편 실라는 빌립보 교회의 소식과 그들이 보낸 연보를 가지고 왔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후 11:9).” 이를 밝히고,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 4:14-15).”

 

곧 빌립보교회에서 보내준 헌금은 이때의 바울에게 있어 아주 시기적절하고 유용한 것이었다. 빌립보교회의 헌금으로 바울은 더 이상 생계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오로지 말씀 전파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말씀에 붙잡혀” 살 수 있던 것도 그와 같은 손길로 인함이다. 곧 실라와 디모데가 온 후 바울은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안식일에만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헌금으로 ‘장막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 말씀 준비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또 준비한 말씀을 전하는 데만 전력투구 하였다. 특히 ‘붙잡혀’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쉬네나케토’는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이러한 사역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이를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즉 방해하고 훼방하거늘 이에 바울의 선교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비난과 대적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한 신성모독이다. 특히 ‘대적하였다’는 것은 반대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바울의 반대 입장에 서서 계획적으로 대적하고 방해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이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사악한 행동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에서 방향을 바꿔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이다.

 

이에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행 18:6).” 할 때 그들은 유대인으로, 바울의 아시아 전도사역을 비방할 때, ‘옷을 털면서’는 곧 ‘엄숙한 맹세’나 ‘저주의 행동’으로 그와 같은 전통이 있었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느 5:13).”

 

곧 바울이 옷에서 먼지를 떠는 모습은 예수께서 12제자와 70인을 정도하러 보내실 때에 ‘영접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 9:5).”

 

이렇게 발이나 옷에서 먼지를 떠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마을에 들어갔다 나오면 으레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는 모습과도 무방하지 않다. 유대인들이 발의 먼지를 떠는 것은 부정한 모든 것을 털어서 거룩한 곳인 자신들의 땅에 묻혀 들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의 행동이다. 즉 이방인의 영향력을 제하여버림과 동시에 자신들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바울은 그것을 역이용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복음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그들의 방식대로 보여준 것이다. 한편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바울의 말은 성경에 근거하여,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 3:18-19).”

 

곧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기 위해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과 그 후손이 지겠다고 장담하면서 까지 사용했던 말이기도 하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 27:25).” 이는 결코 단순한 저주나 악담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살인자가 죽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과 그 책임에 따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나는 이른 새벽 교회로 올라와 말씀을 묵상하고, 또는 아이가 궁금하게 여겨 정해진 시간에 따라 말씀구절을 보내오는 것을 가지고 성경을 찾는다. 요즘은 오후께 빈둥거리는 시간을 줄여 아파트 안에 마련된 도서관으로 간다. 혼자 들어앉아 설교원고를 작성할 때와 달리 보다 신중한 자세(?)로 말씀을 더 집중할 수 있기 위함이다. 곧 나의 이러한 시간들이 귀하다. 그리할 수 있는 육신의 정도와 마음으로도 감사하다. 두어 시간 앉아 있으면 엉덩이부터 허리, 목 등이 아파오지만 그 또한 견딜만하여 충분하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다소 고의적인 혹은 습관이 되어버린 죄에 대해 꾸준히 되돌리고 인식하여 주 앞에 나를 온전히 세우려는 노력은 무던하여야 한다. 이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이를 오늘 시편으로 살필 때, 세상을 보며 저들의 가시적인 현실의 성공과 그 결과를 보면 우린 좌절할 뿐이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살면서 저들의 그런 모습과 오늘에 처한 나의 모습이 비교가 되어 우울할 수 있으나….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2-13).

 

이와 같은 좌절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수시로 드는 마음이겠으나,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17).

 

결국 내가 머물며 주를 바라게 되는 곳은 성소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0).

 

저들의 결국은 알면서,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1-23).

 

하여 간구하기는,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4-25).

 

그러므로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