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전봉석 2024. 10. 22. 02:25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레 3:1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72:18-19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은 드리는 자의 형편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짐승으로 가능했다. 흠 없는 수소나 암소(1-5), 흠 없는 수양이나 암양(6-11), 흠 없는 수염소나 암염소(12-17) 등 앞에 모두 ‘흠 없는’ 것을 전제로 한다. 화목제의 경우, 번제와 달리 희생 제물로 비둘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화목제의 독특한 특징인 제사 후 공동 식사에 있어, 비둘기는 여럿이 함께 나누어 먹을 음식량으로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생의 뜻은 죽이다, 도살하다란 뜻을 가진 ‘자바흐’란 히브리어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곧 죽임 당하여 제물이 될 짐승을 가리킨다. 또한 화목제는 ‘수컷이나 암컷이나’ 번제나 속건제 등의 제사에서 반드시 수컷만 요구하시는데 반해, 화목제에서는 암수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화목제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와 교통, 인간과 인간의 상호 친밀한 교제를 도모하는데 있어 암수, 남녀의 차별이나 구별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교통하는 데 있어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다. 이에 안수하고, 곧 제물을 가져온 자가 자신의 양손을 양뿔 사이에 얹고 힘껏 내리 누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안수가 갖는 두 가지 의미는 연합과 전가이다.

 

이를 회막 문에서 잡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 흘리는 모든 짐승을 잡을 때 결코 자신의 장막에서 잡을 수 없었다. 반드시 성막 안으로 끌고 가 회막 문 앞 번제단 곁(북편)에서 잡아야 했다.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레 1:11).” 그러나 이는 후대에 이르러 단지 제물로 드려지는 것만 그리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 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너는 여호와께서 주신 소와 양을 잡아 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먹되(신 12:20-21).”

 

식용을 위한 짐승은 예외로 가나안에 들어가 도처에 흩어져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과 같이 성막을 중심으로 운집하여 살고 있는 광야 시대의 전통으로 짐승을 잡게 할 수 없었다.

 

화목제가 하나님과의 화해와 교제, 그리고 인간 상호 간의 기쁨을 나타내는 축제의 제사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제단 사면에 뿌려지는 희생 제물의 피 때문이다. 이는 대속과 속죄를 상징하는 피가 제단에 뿌려짐으로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모든 죄악과 진노가 해결되고,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불신과 증오의 벽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번제(1장)와 소제(2장)에 구약의 5대 제사 중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 화목제의 제물은 번제 때와 같이 생축이었는데, 소(1-5)나 양(6-11), 염소(12-17)로 드릴 수 있다. 화목제는 누누이 강조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한 것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이다. 수은제, 평화제, 구원제, 감사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베풀어 주신 축복과 구원에 대해 감사할 때 언제든지 자발적으로 드리는 감사제이다. 또한 간구가 이루어진 경우 혹은 이루어질 줄 믿고 믿음으로 바치는 서원제이다. 그리고 조건 없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시할 때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자원제, 일명 낙헌제 등이 있다. 결국 화목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드리는 기쁨과 화해의 감사 제사이다.

 

이는 또한 희생 제물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허물없는 화평,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교제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흘리신 보혈로만 가능하다. 성도는 화목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의 결과를 배울 수 있다.

 

구속의 결과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허물없는 화평의 관계이다. 성도와 성도의 기쁨 중 교제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성도 각자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천국의 감사 생활이다. 모든 게 감사할 수 있다는 데서 우리로서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로써,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분명 오늘 나의 감사에는 예수의 피가 그 값으로 흘리심이다. 그러므로 함께 나눌 화목이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그러므로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5-47).”

 

오늘 우리 교회가 이루어져 가는 그 배경에는 묵묵히 주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누군가의 헌신과 헌금이 있다. 실제 교인의 수로 자립하여 설 수 없는 교회로서 아이들 곧 청년으로 또는 여러 신앙상담과 영상으로의 성경공부로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누구 말처럼 교회가 유지되려면 또한 그만큼의 가시적인 활동이나 외형적인 건물이나 교인의 숫자가 있어야 하는데, ‘한 영혼’을 운운하며 소박하게(?) 목회를 하고 있는 실정으로는 그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그때마다 주님이 직접 운행하심을 목격한다. 때를 따라 돕는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꼭 필요한 만큼이다.

 

하여,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나는 항상 드려지는 누군가의 손길에 혹은 익명의 기도와 헌금에 대하여 갚을 길이 없으나 그리하여 주 앞에 아뢰고 또 고한다. 화목제는 이와 같아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나 사이, 또한 우리가 서로 주의 이름으로 하나 되는 사이로의 감사이다. 이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나는 아픈 아이나 늘 경계성 장애로 시달리는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저들의 어려운 심정을 주께 아뢴다.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 곁에는 그런 아이(?)들이 많은데 이제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약을 복용하면서 그 부작용을 호소하나 약을 먹이면서도 적응하게 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저녁 열 시 반 무조건 약을 먹는다. 약을 삼키고 돌아눕기 무섭게 잠에 곯아떨어진다. 부작용으로 침이 흘러나와 입가에 수건을 흥건하게 적실 정도이다. 이 때문에 어디 저 혼자 보낼 수가 없다.

 

병명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모두는 상한 심령이라, 누가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낼 때 나는 그저 읽는다. 또는 듣는다. 뭐라 조언을 하거나 일깨워 가르칠 목적으로가 아니다. 무던히 그러하다 서로는 익숙해지고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작은 것부터 그 습관을 바로 잡아간다.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누가 일러 일깨울 수는 없어도 본인이 이를 인정하면서 현저하게 달라진다. 더욱이 우리가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을 고백함으로 놀랍다.

 

지난주일 아이의 기도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 감격스러워 울컥, 하며 저절로 아멘, 하고 탄성이 나왔다. 이제 저 자신도 그 표현을 정확히 하려고 예배 전 30분에 와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메모했던 내용을 정리하고 대표기도 때 이를 바탕으로 하는데 그 준비가 귀하고 놀라웠다. 하나님과 저 사이의 화목이 감사하고 귀하였다. 한동안 언어와 사고, 언어와 언어 사이가 너무 멀어서 책장을 여러 장씩 건너뛰듯 읽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 줄씩 한 장씩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는 것 같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화평을 주는 자들이다. 곧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 12:20).”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할 때 서로에게 있어 화목을 더한다. 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우리가 내는 서로의 맛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같이 나눈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화목은 우리의 사명이다. 화목제는 이와 같이,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3).”

 

이로써 오늘 우리 개개인은 그 사명을 다해 주신 상황을 산다. 더러는 안 믿는 가족들과 혹은 사회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이 놀라운 사명 앞에 새삼 놀랍다.

 

내가 저 한 영혼을 사랑하는 데 있어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나 그런 목회자는 아니라 해도 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영혼인 것은 확신한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사랑함은 주의 마음으로 온 천하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크고 귀한 일이다. 이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오늘 본문의 화목 제물과 같이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7-19).” 이 놀라운 사실은 감추어진 게 아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다. 누구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 80:18).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72:1).

 

그러할 때,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 26:13).”

 

이에,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72: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