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
레 7:37-38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화목제는 이른바 구약 시대의 5대 제사이다. 1-7장 사이에 기술된 각 제사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때의 위임제는 따로 나타나지 않지만, “너는 다른 숫양을 택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지며… 아론의 성의는 후에 아론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으로 위임을 받을 것이며 그를 이어 제사장이 되는 아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성소에서 섬길 때에는 이레 동안 그것을 입을지니라(출 29:19, 29-30).”
위임제는 채우다, 봉헌하다란 뜻으로 여호와의 제단 위에 제사 예물을 드리도록 손에 무엇인가를 채워주는 의식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자로 제사장을 성별하는 의식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성별되어 제물을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는 ‘특수한 제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위임제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과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이러한 기존의 여러 제사 방법을 통하여 성직을 임명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이루는 특별 제사이다.
이렇듯 그 예물들을 드리라고 명하신 날은 성막이 건립되어 하나님께 봉헌된 날로 출애굽 제 2년 1월 1일부터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을 떠난 날은 같은 해 2월 20일이었다.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민 10:11-12).” 그러니까 하나님은 건립된 성막에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이르신 것으로, 제사 제도와 제사장의 규례에 대한 지시를 출애굽 후 2년 1월 1일로부터 2월 20일 사이에 말씀하신 것이다.
속건제는 사회적 범죄에 대한 처방과 같아서 정직한 삶을 요구하신다.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7).” 이는 곧,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 119:104).
할 때,
교회는 이에 말씀으로 치리하고 다스려야 한다. 곧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이는 우리가 교회에 속한 자들로 하나 되었음을 의미한다.
교회가 죄를 죄라 이르지 못한다면 그 역할은 무색하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그에 따른 교회의 사명은 말씀으로 올곧고 굳건해야 한다. 사회에 휘둘리고 사람들로 좌고우면하면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옳지 못함을 인정한다. 고로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이를 위하여 구약의 성도들은 이와 같은 제사 제도에 따라 자신의 죄를 성막 즉 교회를 통하여 처리하고 처방받으며 주 앞에 성실하였다. 오늘 2절의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하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는 사셔야 한다.’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의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레 7:2).” 이를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4-7).”
하여 이 모든 제사 제도는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그에 따른 제물이 되심으로 피 흘려 우리들은 속죄함을 받은 것으로 연결된다. 고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는 고백으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교회에 속한 자로 저마다는 개체적으로 성소이며 동시에 하나 되어 연합한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하는 신앙으로 산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 드려지는 하루는 가장 최상의 것으로 그때마다 이를 의식함으로 매순간이 주께 드려지는 시간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고, 병적으로 이어지고 확장되는 아이의 생각을 스스로 인정하고, 약물복용과 함께 이를 인정함으로 억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 꽤 긴 시간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자신의 상태(?)를 두서없이 말할 때 나는 속으로 주께 구하였다. 나의 이해와 나의 할 말을 주가 주관하시기를 말이다.
친구와 통화를 할 때도 해야 할 말과 들을 수 있는 귀를 동시에 간구한다. 그러할 때 나의 그 순간은 최상이 되고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드려진다. 곧 우리의 한 날 동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 3:9).” 이와 같은 마음으로 누구와 대화하거나 어떤 일을 마주할 때,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2-14).”
하여 나의 최상은 최고가 아니라 주 앞에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때이다. 아이의 속마음을 들을 때, 무엇을 설명하며 말해주어야 할 때, 큰 교회(?)를 다니는 친구에게 교회들의 다양한 어려움과 그 속의 유혹들에 대하여… 나는 말하기를 조심하고 듣기를 주의한다. 그러하기를 주께 구한다. 아이의 말은 겅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 같아서 살랑살랑하다 휙, 하고 사라지는 이야기에서 나는 가끔 들은 말과 할 말을 연결하지 못하고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친구라는 특수한 관계로 퉁명스럽게 말씀이나 교회에 대해 말할 때 이를 새겨듣기는 말하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결국,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나는 나의 부족함을 아룀으로 나의 말의 실수와 자칫 오해할 수 있는 소지의 듣기나 말하기에서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속된 말로 나는 개떡 같이 말해도 저들로는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의 영이 이 시간 함께 하시기를. 하여,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주가 하실 때 탈이 없다. 그래서도 나는 상담이니 성경공부니 하고 내가 나서서 그리 행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 같은 자로 어떤 이의 상처나 그의 속엣 얘기를 들어야 할 때 나는 주가 그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구함으로 나의 부족함까지도 저에게 위로가 되고 권면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를 좀 더 의식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렇게 해서 주께 바쳐지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그리하여,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의식적으로 조금은 중심을 잡고 나의 시간이나 마음을 희생 제물로 드린다는 생각으로, 오전 일찍 아이가 출근에 앞서 말씀을 묻고 듣기를 원할 때 그 시간에 깨어 앞서 준비한 말씀을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롬 14:19, 약 3:18).” 돼도 않을 소리 같지만 나의 한 날, 나로 의식하게 하시는 이에 따라 행한다.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이를 수정하여 출력하면 한 주간의 할 일이 끝나는 것 같다. 어제는 오전 열한 시 전에 이를 마치고 잠시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요즘은 의식적으로 자주 걸으려고 한다. 따로 운동을 할 수는 없어도 걷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는 것인데, 제법 멀리 돌면서 여러 광경을 무심히 보면서 지나갔다. 어느 야채가게에는 다른 곳보다 가격이 저렴한 것인지 사람들이 와글거리며 길 한 가득 모여서 손에 든 야채나 과일 바구니를 보듬고 있었다. 그 앞 도로 높은 빌딩 위로는 대형 간판을 설치하느라 사다리차가 길고 위태롭게 도로 안쪽까지 밀려나가 있었다. 동네 안쪽 한갓진 곳에는 햇살마저 조용하니 소담하였다.
나의 한 날 한 날은 별 거 없이 무심하였고, 혼자서 국숫집에 들어가 잔치국수로 점심을 혼자 해결했다. 아이는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하여 집에 갔다가 두 시 반께 도서관에서 만났다. 그 사이 한 시간 남짓 친구와의 통화는 일상 속에서의 교회나 말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와 같이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일상이 곧 예배가 되는 삶이란 모든 데서 주를 의식하고 주께 묻고 주의 도우심을 바람으로 주를 인정하는 데 있다. 나의 은혜는 이렇듯 소모되고 채워지며 하루 또 하루씩 만나처럼 모자람이 없다. 오늘 본문 12절을 그렇게 읽었다.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레 7:12).” 은혜란 감사로 되돌려지는 일이어서 화목제가 드려진 후 모두가 이를 같이 나누어 잔치하듯 먹는다. 내가 받은 은혜로 나를 내어줄 수 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의 일상이 곧 나의 것과 맞물려서 같이 돌아가는 구조 같다. 이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고로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가 따로 구분할 수 없고 서로가 주 안에서 하나 됨은 그 시대가 다를 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 안에서 동일하다. 하여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이는,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4).
결론은 또 감사여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21).” 하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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