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 10:1-2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시 79:11
우리가 주를 경외함은 주를 인정하는 데서 두려워할 줄 알되 이를 귀히 여김이었다. 누가 말하길, 이 나이에 내가 무슨 사역자가 될 것도 아니고… 하면서 사역이란 목사나 교역자나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사는 게 사역이라 하였다. 주신 삶에서 주를 인정함으로 ‘아픈 것도 일’이라는 생각으로 흔히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이 모든 생을 다하는 게 사역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빛과 소금이 되는 삶으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6).”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스스로 그리 여기는 한 별 수 없는 일이다. 주 앞에 아뢰어 용서받지 못할 것이 없음을 알 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이에 오늘을 사는 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0:12-13).” 하신 데 따른 삶으로의 생을 다하는 일이라 설명하였다.
오늘 말씀 서두의 내용은 엄위하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내 엘리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네 아들 가운데 둘이었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었다(출 6:23). 이 중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 직무를 잘못 감당하여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했다. 때문에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이 후일에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어 레위 족속의 어른이 되었다(출6:25, 민 20:28).
저들은 향로에 다른 불을 피웠다. 향로는 성소 안에 설치된 분향단으로 아침과 저녁마다 새로이 향을 사를 때 사용되는 불씨를 번제단에서 향단까지 옮기는데 쓰이던 금제 그릇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불똥 그릇이라 하고(출 25:38), 통(출27:3, 38:3)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불’이란 말 그대로 이상한 불인데 이 불이 구체적으로 어떤 불을 가리키는지는 모른다. 다만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 즉 번제단의 제물이 타는 불이 아닌 일반 불이나 다른 용도의 불을 의미하는 듯하다.
나답과 아비후는 분향할 불로 오직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어긴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규례를 멸시하는 행위였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에 해당한다. 한편 나답과 아비후가 이러한 죄를 범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날에 독주를 마신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 곧바로 독주를 금지하는 규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레 10:9).”
그때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나답과 아비후를 심판하였다. 이 ‘불’은 하늘에서 직접 내린 것이기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속죄소로부터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나온 불이다. 아론이 제사장 직무를 처음 수행할 때 나타났던 여호와의 불과 동일하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9:24).” 이 불은 일반적인 불과 달리 옷과 몸은 태우지 않은 채 두 사람만 죽이고 말았다. “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5).” 이는 여호와의 거룩하심과 아울러 불순종의 범죄가 낳는 비참한 결과이다.
이처럼 구약에는 여호와의 불이 심판의 불로 범죄한 백성들을 징벌할 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민 16:35).” 그렇게 ‘그들을 삼키매’ 그들은 ‘죽은지라’ 이는 나답과 아비후가 불에 완전히 타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심판으로 급작스럽게 죽임을 당한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하루를 사는 일이 어느 날도 허투루 예사로운 날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러한 말씀이 어느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다. 우린 모두가 주 앞에서 사역을 맡은 자들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곧 전에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던 내 곁의 아무개가 주의 성도로 여겨진다. 그 한 영혼을 위해 마음을 쓰고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것으로 우리가 우리 곁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일 텐데,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3, 17).”
이는 곧,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잠 24:28).”
하신 말씀으로 이어지면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어찌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겠나? 생각하면 당연히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도는 이 또한 사역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같이 저들 아비후와 나답이 범죄한 까닭은 바로 그 직전에 하나님이 아론이 드린 제사를 기쁘게 열랍하신 뒤였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2-24).”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에 든다는 것은 순간 안일할 때, 해이하야 그럴 수 있는 일로 가벼이 여길 때, 방심하여 술에 취해 안이하였을 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르시길,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이를 바울의 설교에서 들으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를 베드로의 설교로도 들으면 더욱 강렬해진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곧 우리가 무심히 여길 때 그 일이 곧 우리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결과가 된다. 이에 우리는 더욱 말씀 앞에 주의하고 온전히 바란다.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신 26:16).” 이처럼 한 날에 앞서 말씀으로 나를 돌아보는 일도 그러하다.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수 22:5-6).”
철저하게 말씀으로 산다는 일은 기계적으로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잠 19:16).” 다만 그 주신 삶을 사는 일로 생을 다하는 동안 삼가 한 날의 수고로 주 앞에 온전하게 하는 일이었다.
누가 묻기를 저는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송구할 뿐이라는 말에 나는 그 마음으로 충분할 것이라 하였다. 우리가 흔히 마음이 그렇다는 것은 그리하여 뭐라도, 시선으로든지 손을 뻗어서라든지 주를 향한 마음을 온전히 하는 일일 텐데… 저의 어려운 형편 그 시련 가운데서 잠잠히 주를 바라는 것만으로도 귀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저로서는 그야말로 사는 게 일이라, 일찍이 부모로부터 버림당하고 기형적인 몸으로 여러 보육원을 전전긍긍하는 동안 뒤뚱거리면서도 주신 생에 충실하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나는 저의 생을 두고 감히 뭐라 할 수조차 없이 사는 것 자체로 경이로웠을 한 날 한 날의 수고로도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오늘에 이르러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외형과 그의 형편에서도 교회를 섬기며 교회에서 저들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 자체로 귀한 사역이라고 말해주었다. 흔히 누가 동정하는 일이나 그리하여 뭐라도 돕고 싶어 할 때 이를 주의 손길로 여겨, 저들로 하여금 그리할 수 있게 하는 것도 큰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령 누가 저의 불편한 몸을 대신하여 식판을 가져다 줄 때, 혹은 예배당 어느 자리를 마련해줄 때, 심지어는 뒤뚱거리다 넘어져 사람들의 이목이 한꺼번에 쏠리며 서로가 도우려할 때….
이를 구차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그리하여 저들로 주의 사랑을 행할 있는 대상이 되어주는 일 또한 귀한 사명인 것을 나는 어렵지만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고 싶었다. 그럴 때 든다는 저의 구차하고 비루한 생각에서 감사를… 남들의 그러한 시선이 못내 창피하고 부끄러울 수 있으나 그 또한 그리하여 주의 사랑으로 저들이 서로 돌아가며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내어주는 일로도… 이를 모멸스럽게 여길 게 아니라, 주가 맡기신 일로 삼을 때…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시 4:3-4).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아픈 것도 일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와 같은 일도 주가 맡기신 일이라면, 우리에게는 사사롭고 하찮은 삶이란 없다. 나의 이와 같은 생각이 내가 아는 성경으로는 그리하여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어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이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더러는 돕는 자로 세우시나 더러는 돕는 자의 대상이 되게도 세우신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느 위치냐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우리는 그 모든 일에서 저마다의 신령한 제사로 주 앞에 드려지는 제사장의 사명이 있었다. 그때에 오늘 저 둘의 안이했던 태도와 달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이에,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시 79:4-5).
하는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9).
하며 주께 아뢰기를,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1).
이로써,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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