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 80:17-18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그리하면 그의 건강과 재물과 여러 환경을 넉넉하게 하시면 좋을 텐데… 내 곁에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어떤 결핍이 있다. 대부분은 육신이 연약하거나 물질에 어려움을 겪고, 더러는 자녀로 인해서나 그 부모로 인하여 이중고를 겪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말하길 이를 들어 비난하거나 조롱하기 일쑤다. 누가 말하길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럭저럭 잘들 사는데 유난히 주를 믿거나 섬기는 자들을 보면 하나 같이 기구하여 유별나다고 하였다.
주의 사랑이 인생의 결핍으로 채워지고 은혜는 기운 곳으로 흐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우리가 세상과 분리되어 성결하게 사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께 정한 자로 사는 일인데 물건도 그러하듯 정함이란 그만큼의 시달림이 따른다. 그릇도 깨끗하게 하려면 여러 차례 씻기고 세제로 닦고 다시 씻기어서 가능하다. 집안을 청소한다 할 때도 그저 늘어뜨려 놓은 것을 매번 정리해야 하고 먼지를 떨거나 쓸거나 닦는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오늘 본문의 여러 짐승들 가운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어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을 나누는데 그에 따른 기준은 성별이었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
우리가 살면서 사는 동안에 이 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무난하여 모든 게 적당하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따로 있기 위해서는 외롭고 더러는 사회부적응자로 보일 때도 있다. 이와 같이 근신함으로 우리는 성별하여진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것으로 우린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그러할 때 자신을 돌이켜 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우리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우리를 시달리게 하는 육신의 연약함이나 물질의 어려움이나 남들과 다른 일을 겪으면서의 애통함으로였다.
누구는 그의 연약함으로 주 앞에 날마다 엎드리며 기독교 대안학교를 이끌어 간다. 누구는 폐가 약하여 호흡이 가쁘거나 몸이 연약한데 그것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교인들과의 성경 묵상을 일주일의 사역으로 삼는다. 누구는 희귀질환의 자녀를 두고서야 주를 간절하게 바라며 주를 인정하는자로 살고, 누구는 일찍이 부모에게 버림당하고 기형적인 장애를 안고 살면서 주님만을 바라며 산다. 이러한 것으로 누구는 은혜를 말하고 누구는 혀를 끌끌 차며 기구하다고 하소연한다.
이로써 우린 말씀에 순응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신 5:33).” 아이는 지적장애이나 스스로의 사고능력 안에서 주를 인정함으로 감사를 채워가고, 또 아이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공황이나 불안장애를 가지고서 주신 생활에서 묵묵히 주를 바란다. 이에 우리의 성별이란,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2-3).”
우리로 순종하게 하거나 그릇된 길로 가게 한다. 누구에게는 사망의 냄새이고 누구에게는 생명의 냄새이다. 나는 이 차이나 기준이 어찌하여 갈리는지 알 수 없다. 마치 에서와 야곱이 어찌 그의 모태에서부터 하나는 축복을 하나는 저주를 안고 태어났는지 알 수 없듯이, 그리하여 누구는 주를 인정하며 산을 오르고 누구는 결국 주를 거역하여 그릇행하여 가는지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오늘 말씀은 이를 명하신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우리로 주를 알게 하심으로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게 되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서 주의 은혜를 바람으로 살게 되었다. 하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나의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 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이성과 이해로 행함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가능하다. 더러는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하기 싫을 때도 묵묵하게 주께 향할 때,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10).” 더러는 인정할 수 없어 몸부림치면서도 우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까지,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6).”
그리하여 내 곁의 누가 혹은 나를 알지 못하나 보고 듣고 느끼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저로써 심판 때에 할 말이 없게 증거가 돼야 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오늘에 자주 쓰이는 ‘갑질’이니, 권세니 하는 말에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어찌 누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신 이를 두고 하대하거나 업신여기며 홀대하고 비판할 수 있겠나?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이를 살면서 의식하고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자리가 복되다. 왜냐하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이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나는 더러 오늘의 어떤 순간이 어려울 때 위의 말씀을 되새긴다. 현실을 두고 생각하면 서럽고 억울하기도 할 일이 이 땅의 삶으로는 한낱 입김뿐이어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에 오늘도 아이가 보내온 성경구절을 찾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준비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아이는 덧붙여 ‘양떼’의 의미에 대해 묻고 아침 7시 반, 출근 전에 뵙겠다고 인사를 남겼다. 저가 내게 맡기신 ‘양’이다.
여기서 ‘여러분은’ 17절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그들 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말하고,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도 같은 수고를 당부한다. 그럴 때, ‘삼가하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게 무엇을까?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라는 것이다. 전력을 다하고,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심하라는 뜻이다. 계속적으로 근면하고 깨어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자기를 위하여’ 또한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당부한다. 구체적으로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주의할 수 없다. 성별하여 깨끗한 삶에 대하여 오늘 말씀과 같이 주의해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 삶이 남들과 달리 시달리는 게 있다면 그것으로 구별되어짐이다.
그러할 때 ‘성령이 그들 가운데’ 우리로 ‘감독자’로 삼으셨다. 이는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정하였던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는가?’ 되물으시며, ‘내 양을 먹이라, 치러, 먹이라’ 하신 것과 같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즉 우리에겐 모두 이와 같은 사명이 부여되었다. 어느 특정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주를 사랑한다면 ‘삼가라’고 당부하는 말씀은 성령에 의하여 그 임무가 위탁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사명은 사람에 의해 주어진 것도, 스스로의 결단이나 의지로 갖게 된 것도 아니다. 여기서 감독은 17절의 장로로 ‘어떤 직무’를 설명한다. 즉 장로, 목사, 감독 등의 직무가 제도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이후였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에서 그 사역의 범위나 책임을 지워 삼갈 것을 당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한 영혼 한 영혼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드신 교회라는 점에서 예수의 대속 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사랑의 확증임을 인정하게 된다. 주님의 교회 즉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성경은 자주 ‘양떼’라 하는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다(고전 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 1:1-2).”
결국 모든 성도, 하나님의 피 값으로 사신 사람들, 그 모임, 교회, 자기 몸이 주의 성전인 것을 아는 사람들을 이르며,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딤전 3:8-10).” 이에 우린 모두가 주의 양떼들(성도)이면서 동시에 주의 양떼를 치는 양떼들(직분자들)로 살아야 한다.
그러할 때에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거룩하여져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심으로,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44).”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 80:3).
우리는 주 앞에 엎드린다. 때로는,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6-7).
이에 주 앞에 엎드림으로 우리는 주의 양떼들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5, 17).
이에,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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