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레 13:2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 82:6-7
출산한 여인의 부정한 기간과 그 정결 규례를 앞서 12장에서 언급하였다. 이어 13-14장에서 문둥병에 관한 규례를 세부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길게 다루시는 이유가 무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문둥병의 초기 증상과 그 진단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피부의 색점(1-8)과 나병(9-17)과 종기(18-23)와 화상에 생긴 문둥병(24-28)과 여타 다른 증후에 대해(29-46) 다루고 있다. 또한 그에 따른 의복에 생긴 문둥병(47-59)을 살핀다. 이를 볼 때 단순히 문둥병을 다루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피부병을 총망라하여 이를 부정하다 간주한다.
곧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우리의 몸이 그 병으로 인하여 파괴당하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죄로부터 철저히 분리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신다. 비록 그것이 작은 죄일지라도 그 나중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여서 죄악은 그 뿌리부터 완전히 근절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특히 문둥병을 특별히 부정하게 취급한 것은 일반적으로 죄의 대가로 말미암은 형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왕하 5:26-27).”
이 문둥병이 지니는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속성은 죄의 무서운 속성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문둥병의 부정을 통해 죄의 심각함과 그 치명적인 인식을 살핀다. 곧 우리가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이란 사실이다. 의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같이 정착촌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어서 아는데, 우선은 양성일 때 전염성이 유력하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소록도에 따로 격리하여 치료하고 음성 판정 후에는 일반인들과 살 수 없어서 정착촌을 두어 별도의 삶을 살도록 유도하였다.
나병은 또 감각이 없고 무뎌서 연약하여 힘든 가운데서도 한 겨울에 마음껏 난방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닥이 탈 정도로 뜨거운데도 그 살갗이 감각을 느끼지 못해서 데고 염증이 나서 상할 정도인데도 느끼지 못하였다. 또한 음성 판정으로 전염은 안 된다 해도 그 외형이 혐오스럽게 일그러져서 일반들과의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나라에서 따로 지정한 장소에 혜택을 주면서까지 저들을 수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세제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하기 직전부터 중학교 졸업 때까지 정착촌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부친에 의해 그곳에서 생활하였는데, 저들의 삶은 스스로도 비통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였고 폐쇄적인 생활을 고집하였다. 그러다보니 문둥병은 일반적인 질병들과 달리 부정 또는 죄의 대가로 하나님의 형벌이라 여겨졌다. 문둥병은 여러 면에서 죄악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오늘 말씀에서도 문둥병의 주요한 특징과 그 상징적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루시는 것은 ‘죄의 파괴적인 상태’를 상대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를 시편에서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데,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시 38:3-6).
심지어는,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1).
하는 부분에서 나의 기억 속의 정착촌 생활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문둥병은 내부적인 질병이며 그 병세가 치명적이다. 죄의 내재적 속성과 더불어 치명적인 속성과 같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3).” 비록 작은 죄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죄는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영원한 사망으로 몰아간다.
문둥병은 환자를 사람과 사회,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격리시키는 질병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 및 부패한 심성이 사람과 사람 상리는 물론 하나님과의 사이를 근본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 된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또한 문둥병은 조그만 반점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온 몸으로 퍼져 전신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전염성을 지녔다. 이것은 죄의 속성과 같이 무서운 전염성을 가진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극히 일부분에 나타난 문둥병의 작은 반점은 곧 그 사람의 모든 육신이 문둥병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곧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모든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과 같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그렇게 해서 이를 진단하는 일은 매우 신중하고 신속하며 정확해야 한다. 부패한 우리의 속성은 죄의 근원이자 뿌리로 그 부패한 심령이 외부로 표현되어 삶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다. 회개를 통해 그 심령이 새롭게 될 수 있는데도 스스로 폐쇄적으로 바뀌어 하나님을 떠나 부정하게 한다. 이러한 속성은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서로 연결되어 죄가 죄를 부르듯 연쇄적으로 죄악을 범하게 된다.
우리 안에 악한 습성은 서로가 닮아 있다. 거짓말을 스스로 터득하고 죄를 은폐하고 은닉하는 일은 본능적이다. 나태함은 죄악 그 자체로 다른 죄를 유발시키며 하나님과의 사이를 망가뜨린다. 결국 자신을 분리시켜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란 착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자신의 약점이나 잘못된 습관을 합리화하면서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을 옹호한다.
결국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리면 죄에 둔감하여 대처가 어렵다. 이에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곧 우리가 영혼을 단속함에는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우린 누구나 죄로 전염된 영적 문둥병자였으나 주께서 우릴 정하게 하심으로 깨끗함을 입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하여,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하시는 말씀 앞에 굳게 선다. 결국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12:48).” 그래서도 때론 과감하게 지적하고, 죄를 죄라 말해줘야 한다.
어제도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리는 사회 생활에서 안 믿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주의할 것을 당부하였다. 물론 그와 같은 소리를 듣기 좋아할 리 없다. 그게 왜 나빠? 하는 반감도 든다. 혹은 알면서도 그러기 싫은, 왜 꼭 그래야 하나? 싶은 생각으로 마음이 좋을 리 없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말하였다. 저들과 어울릴 때 술자리도, 오가는 내용의 이야기들도 어느 것 하나 우리 영혼을 성결하게 하는 것이던가?
하여 삼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 18:15-16).”
때론 이게 제일 어렵다. 죄를 죄라 못할 때 얼버무린 얼룩 같은 죄악이 덧나서 문둥병처럼 우리 영혼을 잠식한다. 영혼이 병들면 그 삶은 완고하여져서 누구의 권면이나 위로를 피한다. 스스로 혼자 알아서 믿겠다는 식으로 신앙도 독자적으로 고집을 부린다. 나이 든 자들의 완고함만큼 자신을 홀로 두려 할 때 그 영혼은 단단하게 굳어져서 스스로도 깰 수 없는 ‘길가 밭’이 된다. 말씀이 씨도 안 먹힌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하여,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 1:13-14).”
신앙에 있어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은 그 어떤 완고함보다 단단하여 모두를 배척하며 살기 십상이다. 스스로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려본 게 언제인지? 자신의 허물과 죄로 눈물지으며 울어보기는 했는지?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주의 용서와 도우심을 간절히 바란 적은 있기나 한지?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2-13).”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근신하고 깨어 두려워할 줄 아는 게 필요하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그러므로 나는 미력하나마 더욱 더 단순해지려 의식한다. 같은 동선을 따라 일정한 보폭으로 하루를 살려한다.
사람을 대하거나 마주하는 일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애써 돌이키며 다시 되돌리려하지 않는다. 더욱이 안 믿던 좋은 사람들에 대하여 때로는 그리움이 짙게 나를 누를 때도 나는 애써 이를 견뎌낸다. 어제도 친구와 무슨 얘기 끝에 누가 보고 싶고,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 울컥,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저들과의 연락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는 데 저들의 무심한 말들이 나의 신앙을 휘젓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고후 2:6-8).”
오늘 시편에서 우리를 신이라 부르시는 까닭은,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 82:1, 7).
곧 우리로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어서, 우리 자신을 주를 인정하는 만큼 자신의 정결함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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