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1
우리가 주를 믿음으로 사는 동안 일심으로 전심을 가지고, 전심을 다해 일심으로 주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이는 곧 ‘피 가운데 생명이 있다’는 사상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속죄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고의 복음이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히 9:22-23).”
이에 ‘피’ 곧 그 자체 속에 포함된 죽음과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죄로 인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속죄의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 15:20-21).”
피는 곧 육체의 생명 그 자체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 9:4).” 하신 말씀과 같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그러므로 피를 마시는 행위는 사실상 생명을 삼키는 것과 같았다. 피로 상징되는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피를 마시는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피를 마시는 행위는 실제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이 즐겨 행한 극악한 제사 의식이다. 피는 속죄의 유일한 수단으로(히 9:22) 장차 인류의 죄를 대속할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하였다. 피는 사람이나 짐승의 생명에 모두 적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나 동물의 생명을 막론하고 모두 생명이라는 한 단위로 취급하심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의 피로 사람의 생명을 속하는 속죄 사상의 교리가 가능할 수 있었다.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실 때, 속한다는 것은 덮다, 가리다는 뜻으로 피가 죄를 덮어 생명으로 하여금 멸망치 않게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명을 피로 ‘속하여’ 살리기 위한 구약의 속죄 방법이었고, 결국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대신하셨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1, 5).”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단순히 짐승의 피에 의한 제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의 상징적인인 효력을 근거로 하여, 그 의의를 믿는 우리의 순종으로 죄를 사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단순히 선악과의 열매를 먹은 것이 죄가 아니라, 그리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가벼이 여긴 데서 죄의 원인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할 때, 한 마음으로 곧 일심(一心)으로 전심(全心)을 다하는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나타나게 된다. 가령 나로서 글방에 앉아 교회를 우선하는 데 있어 누가 문의를 하면 이것이 교회인 것과 나는 목사인 것을 먼저 밝힘으로써 단순히 글쓰기를 위한 글방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한다. 결국은 하나님이 보내시든지 맡기시든지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데서, 나는 누가 오고 안 오고 수업여부를 그리 판단하고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다시 들어가면,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시 86:11-13).
그러니까 나에게 이제 글쓰기란 우리 안에 내재된 ‘깊은 스올’을 언어화하는 일이다. 단순히 문학의 차원을 넘어 신학과 신앙으로의 전개를 구하는 일이다. 글쓰기가 자신의 죄를 직면하는 수단이 되고 주께 아뢰고 고하는 방법이 되길 바란다. 그러할 때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 온전한 마음으로 주 앞에서 하나의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이렇듯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는 곳이다. 나는 더 이상 글방 선생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혼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말씀과 기도와 행함으로의 글쓰기를 목표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할 때 모든 삶이 그러하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것으로 어제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결국 오늘 우리의 이 모든 고백과 삶이 궁극적으로는 창세 전에 예정하심으로 택정하사 이루어진 일이 된다. 창세 이후 그 어떤 이름도 생명책에 기록됨이 없다. 곧 우리가 선을 행하고 의를 다하여 생명책이 그 이름을 기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은총이다. 오늘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신비다. 이를 위하여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바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결국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 외에는 이룰 수 없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놀라운 은혜의 사실 앞에 순복하여,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
그렇게 우린 더 이상 예전에 즐기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 친구와도 말하길 누가 우리더러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미래를 약속한다 하여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겠나? 하고 물었을 때 저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런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하심과 누가 우리에게 억만금을 준다 해도 다시는 말씀을 떠나 살 수는 없다.
이는 곧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유익과 그 어떤 즐거움으로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의 법은 우리 인생을 유익하게 하는 사랑이다. 오늘 3, 4절 말씀에서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이는 어쩌면 참 번거로운 일이 되었다.
전에는 식용으로 쓸 때 아무 곳에서나 잡을 수 있던 것이 오직 회막 문에만 잡게 된 것이니, 번거로울 뿐 아니라 무거운 짐 같이 여겨질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앞서 저들이 들에서 동물을 잡을 때 은연중에 애굽의 신인 ‘판(pan)’에게 제사하는 형식을 빌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나오고 얼마 안 돼 여전히 애굽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던 터에 판에 대한 숭배는 무의식적으로 들판의 신 판을 연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곧 우리가 세상과 어울려 생활하던 습관과 무의식적으로 허용하고 받아들이며 살던 문화를 떨쳐내는 데 있어 하나님의 법을 따를 때, 더러는 그것이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럼에도 순종하여 회막 문 앞에서 짐승을 잡음으로 그것이 비록 짐승이나 하나님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과 그 피의 의미를 중히 하심으로 하나님의 법이 우리 삶의 질서와 위생과 법도를 바로잡은 발판이 된다. 하여 예수님도 이르시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정작 인숙하게 여겼던 것들로 우리가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가를 알게 된다. 이에,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40).” 더러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겠으나 그렇게까지 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영역의 주의 사랑도 안다. 곧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9:1-2).
진정 우리의 복은 그저 일시적인 게 아니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우리 나이쯤 되니까, 하품을 하다가도 담에 결리고 돌아앉다 뼈가 어긋나기도 하면서, 아차 하는 순간에 뜻하지 않은 일이 우리 생활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고 조심하게 된다. 이를 그저 단순한 실수나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가벼이 여길 때 문득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서 후회와 탄식이 울려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귀한 것으로 주를 섬기는 것이라서, “제사장은 그 피를 회막 문 여호와의 제단에 뿌리고 그 기름을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할 것이라(레 17:6).” 이와 같은 말씀 안에 답이 있었다. 하여,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설마 내 것이라 여길 때 순간 미끄러져 넘어진다. 아까운 생각에 조금은 감추어두고 전부라고 속이려 한다. 우린 더 이상 아나니아나 삽비라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요즘 한참 다니엘 기도회를 하면서 여러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하고 친구가 쑥스러운 듯 물을 때,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주께 바라고 구하고, 저간의 여러 형편과 사정을 아뢰라’고 설명하였다. 어떻게는 다음 일이다. 징징거리는 아이가 아빠를 붙들고 떼를 쓰듯이, 미주알고주알 속절없이 일러바치는 아이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주께 말하고 또 아뢰어 어떻게 하면 좋은지는 주께 묻는 것으로… 그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7-10).”
그럼 우리로서는 아뢰지 못할 게 없다. 우리가 아뢰면 주가 모르실 리 없다. 용서 못하실 죄가 없듯이 들어주지 않으실 이유도 없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7-10).”
이에, 회막 문 앞에서… 너무 번거로울 것 같은데,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 86:1-3).
주 앞에서,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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