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가 들어가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8:30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1-2
오늘은 관계와 관계에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시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먼저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2).” 하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3-4).” 하시며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관계에 대해 분명히 하신다.
이는 예수께서도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심으로 우선해야 할 것을 밝히 알게 하셨다. 이에 우리의 성(性) 도덕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을 향해 ‘전에 살았던 애굽’과 장차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악한 풍습을 따르지 말 것을 강력히 지시하신다.
그런 가운데 성(性)에 대한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윤리의식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근간이 우선된다. 특히 오늘에 이르러는 여러 성의 관계에 있어 동성에 대한 윤리와 심지어는 짐승과의 교접에 있어서도 심도 있게 묵상해야 한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금지 규정은 신성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짝지어 주시고, 이를 아름다운 결합으로 보셨다. 그런데 이 원리를 역행하고 파괴하는 변태적인 범죄 행위로 성경 전반에 걸쳐 동성애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는 이를 각자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로 여겨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점 사회윤리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문제로 전락하였다. 오늘 치러지는 미국의 대선에서도 여성의 낙태권이 표를 얻는데 주된 관심이 되었고,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 문제를 가지고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표심을 끌어 모아 결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이 모든 문제의 문제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가령 소돔이 멸망한 것은 가증함 때문이었다. 가증하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토에바’라 하는데 혐오하다, 토하여 내치다란 뜻이다. 주로 성적 방종과 우상 숭배를 정죄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신 27:15).”
우리가 살면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가증할 때 무엇으로 그 앞에 설 수 있겠나? 가증한 일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해외뉴스 같은데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 앞에 놀라우면서도 예사로운 일이 되어 씁쓸하다. 교합하며 성교까지는 아니라 해도 저마다의 애완동물을 키우면서 물고 빨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보다 더욱 친밀한 것을 보면, 수간(獸姦)을 능가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짐승과의 수간이 빈번하였다. 주로 문란한 제사의식에서 이와 같은 패륜적인 행위가 행해졌는데, 고대 기록에 보면 실제 애굽 여자들은 종묘 숭배 의식상 수 염소와 교합하였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개와 그 짓을 저질렀다. 심지어 근대에도 애굽 남자들이 악어의 암컷과 교합한다는 내용을 본 적 있다.
이는 앞서 이교도적인 행위나 이방의 우상 숭배 의식에서 행해지던 일이었고 심지어 현대에는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소아성애자가 급증하고 있기도 하다. 성경은 이와 같은 일을 철저히 금하셨고 이 패역한 행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모 형제 인친척간의 성적 쾌락이나 학대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짐승과의 그 짓도 비번하다고 하니,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면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그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5-16).”
이는 가차없다.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1).”
곧 사람이 자신의 쾌락과 자기주도적인 선택에 있어 ‘문란한 일’에 대하여, 이는 ‘섞다’, ‘혼합하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다’는 뜻으로 야수와 같은 짓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어지럽히는 죄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주를 경외함은 이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우선하는 감정을 억제한다.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본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함이니이다(렘 5:5-6).”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그러므로 우리의 선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악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가증한 일이다. 우리의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이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하여,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시 119:160).
말씀으로 우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귀히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살면서 나이 들어 주가 더하신 날을 다하는 동안 그 삶에 충실한 것이 가장 귀한 사역이었다. 나는 요즘 아흔한 살의 장모와 여든을 넘긴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생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제도 나의 늙으신 장모는 양쪽 다리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퉁퉁 부은 손으로 자신의 무릎과 발을 주무르고 때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눈물겨웠다. 친구는 섬기는 교회 목사님이 전립선암으로 판명난 사실을 알리며 뒷말을 잊지 못했다. 나는 뭐라 즉답을 하지 못하고 한참을 숨을 고른 뒤 평이한 위로밖에는 못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부여하신 삶을 사는 데 있어 남자와 여자로 혹은 자녀로 부모로, 형제로 자매로 지내면서 그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물론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 마음의 온전함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를 생각하였다. 누구는 연약한 육신으로 생을 살고, 어디 불편하고 나약한 신체 일부를 건사하며 사는 일에서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실 때, 우리의 거룩이란 주신 바 그 주신 이의 뜻에 따라 충성되이 사는 일로,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아, 이 막중하고 고귀한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이와 같은 말씀을 얼마나 귀담아 듣고 살아가는지?
허투루 여겨, 설마 하는 심정으로 내남없이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우린 얼마나 자주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자로 살고는 하는지?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어처구니없어 하며 한심하게 생각하다가도 나 역시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데서 ‘가증하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결국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여 오늘도 아이가 문자로 보내온 말씀구절을 찾아 읽고, 아침에 출근 전에 아이와 나눌 성경공부를 준비한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26:14-15).
이 부분은 바울의 애굽 시절이랄 수 있는, 사울이었다가 바울이 되는 ‘회심’의 순간을 기록한 내용이다. 본문은 바울을 부르실 때 히브리 말로 이르셨다. 또한 그의 이름을 사울이라 하며 아람어로 불렀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22:7).” 이와 같이 바울은 이때의 일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간증하였다.
이어 들리는 음성 중에,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하시는데,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심은 일종의 속담과 같이 ‘신을 대적하는 행동이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한 일’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곧 농경사회에서 가시채는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으로, 밭을 갈 때 소나 말을 다스릴 때 때리는 도구로 쓰였다. 그때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했다. 한편 이 속담은 유대교 내에서도 알려져,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시 16:4).
하는 내용으로 우리가 어떻게 신앙적인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가를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바울이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그때는 유대교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열정으로 기독교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지만,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주도하고 목격하였던 저로서는 그 양심에 찔려 괴로웠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점차 혼란과 번민에 빠져들었을 바울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려 다메섹으로 가다 주께서 정해진 섭리에 때라 자신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꾸짖어 직면하게 하신다. 곧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음을 자주 언급하여 이처럼 기회 있을 때마다 그때의 일을 속담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십니까? 할 때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시는 이 한 방에 저는 눈멀었고 열정적으로 하던 일에 숨이 막혔을 것이다.
아이와 성경공부를 앞두고 있는 수요일 새벽, 나의 말씀 묵상은 작은 설교원고 한 편을 작성하는 것 같이 새롭게 말씀을 열어 보이시는 것을 느낀다. 오늘은 이와 같이 모든 관계에 있어 우선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거룩을 상실하였을 때 오는 인간 이하의 역행하는 관계로 치를 떤다. 한 평생의 맡기신 생을 다하는 동안 우리들로 주와 더욱 거룩하기를 바라시는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에 오늘도 시편으로 마무리 호흡을 하면서,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1-2).
하심을,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5).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6).
우리의 출생과 생의 목적과 그 끝의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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