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레 16:30-31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시 85:7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그렇지 못하였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지 않으신 불로 제단에 분향하려다 회막문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이는 저들도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그리되었다. 단순히 성소에 들어가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다 그리되었다. 이에 속죄일 규례를 언급하기 전에 나답과 아비후 사건을 언급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거룩한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둘째, 하나님을 섬길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대로 가감없이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특히 ‘이 날은… 모든 죄에서 … 정결하리라.’ 하실 때,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 그러니까 “이는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31).” 하시는데, 우리가 부지중이나 무의식중에 허물을 범하고 속죄하지 못한 죄악을 이 날 속죄일 규례를 따라 사하신다는 뜻이다.
구약의 속죄 제도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여 실지로 죄를 제거하거나 없앨 수 없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1-4).”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히 이루실 구속 사역을 미리 바라보게 하시려고 이를 명하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 곧 그의 보혈의 피에 근거하여 지금 우리를 ‘정결하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이와 같은 행위로는 누구도 정결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1, 4).”
그러므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이에 “큰 안식일” 곧 ‘안식의 안식일’이란 뜻으로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레 23:32).” 히실 때, 우리가 ‘쉴 안식일’로 영원한 안식일로 죄를 속죄하는 속죄일에 모든 백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쉬면서 자기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고, 스스로 괴롭게 해냐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날은 ‘특별한 안식일’로 육체적 휴식이 강조되는 일반 안식일과는 달리 죄의 각성과 영적 회개에 전심을 다해야 하는 날이다.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금식하면서 회개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금욕과 고행을 실천하라는 말이 하니라, 죄에 대한 그만한 각성과 회개하는 일을 전심(全心)으로 하라는 것이어서, 온전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괴롭게 할지니’의 기본 의미는 ‘억누르다, 비천하게 되다, 복종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결국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의 이런저런 궁리나 생각을 아니할 수 없으나 그 일을 실행하는 데는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따른다. 곧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의 순종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이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2:11).
때론 이 일이 이해가 안 되고 우리의 판단으로는 좀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주의 일도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옳을 것 같아도, 멈춤. 그리고 주께 아뢰고 확실한 뜻을 구하는 일이겠다. 죄란 결국 내 의지나 내 방식대로 결정하고 행하는 일이 된다. 이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130:3-4).
이와 같은 중심을 잃지 않고 사는 것, 이를 말씀은 은혜라 하시는데 곧 우리가 말씀을 맡았음이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3:2-4).”
이를 위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다시는 사람으로 중재가 곧 제사장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중보자 예수께서 계심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4-15).”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의 성도들보다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5-6).” 이를 앎으로 복되다.
오늘도 세상으로 일컬어지는 우리 곁의 블레셋과 앗수르와 애굽을 위시하여 더 가까이는 에돔이 있고 게달이 있다. 에돔은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예이고, 게달은 이삭의 이복형제였던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 중 하나이다. 곧 두마는 에돔을 상징하는 명칭으로 ‘침묵’을 의미한다.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구약 선지서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는 에돔이 이스라엘과 같은 혈통으로 가까운 나라이나 형제인 야곱의 자손에게 항상 포학을 행하였다. 그리고 유다의 패망을 방관하고 즐거워했다.
또한 두로까지 왕래하며 장사하던 에돔의 이웃(창 10:7, 25:3, 렘 49:8, 겔 25:13)과 드단의 대상들, 곧 게달의 후예들에게 “드단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말을 탈 때 까는 천을 너와 거래하였도다(겔 27:20).” 저들은 서로 통용하고 거래하며 도움이 되던 나라들로, 드단의 상인들은 낙타를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였다. 바벨론이 멸망할 때 그들은 칼날을 피해 수풀 속에 거주하며, 데마 거민들을 통해 물과 떡을 제공받으며 살아남았다.
곧 우리 곁에서 보란 듯 잘만 사는 안 믿는 가족들이나 가까운 이들이 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때로는 믿는 자로 우리의 궁벽함이 속수무책이다. 저들에게 이는 빌미가 되어 그렇게도 하나님을 믿는 일을 싸잡아서 경멸하거나 멸시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러하여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겸손과 성결의 옷을 입는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의 마음고생이 우리로 주 앞에서 온전하게 한다. 결국 오늘 본문 4절과 같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레 16:4).” 할 때,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겨진 세마포 관만을 착용하였다.
이와 같이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우리의 겸손과 성결은 가깝다. 내가 주 앞에 나의 주장이나 생각을 아뢰다가 그로 인하여 나의 삶이 주의 주도하심 아래 놓아두심을 인정할 때 평안으로 성결하여진다.
비록 자랑할 것 없이 작은 교회이고 한두 영혼으로 힘에 겨워하고, 나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조차 주께 송구할 따름일 때…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이로써 이제는 안다. 내가 살 길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주의 의로 살 길이다. 나로서는 그 어떤 선행으로도 심지어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결국은 주의 사랑으로였으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6:11, 8:2).”
그리하여,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이 놀랍고도 가장 쉬운, 귀하고도 아름다운 은총으로, 나는 다만 오늘도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주께 아뢰며 내게 맡기신 한 날의 삶에서부터 나의 모든 사역에 이르기까지 주 앞에 내어드림으로 비로소 자유함을 얻는다. 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나의 연약한 육신에서부터 자식들 일이나 교회나 나의 남은 날들을 모두 주 앞에 내려두고,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하여 내가 주를 믿고 의뢰하는 가장 쉽다고 하는 것은 그 믿는 것조차 내가 하는 게 아니어서, 주의 강권하심에 몸을 맡기듯 마음을 놓아두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소 무책임한 듯하나 이로써 나는 나와의 싸움을 벌인다. 나의 판단이나 기준을 허문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 여러 생각이 들끓는데도 이로써 주 앞에 놓아두는 일,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7-18).
결국 내가 힘든 것은 나로 하나님과 거리를 두게 하는 죄, 내 의지나 생각이 문제였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는, 오늘도 시편으로 사고하며 아뢰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시 85:1-2).
나에게 입히신 은총에 따라,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3).
아, 이 은혜!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6-7).
하여 구한다. 그러할 때,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0-11).
나의 오늘 한 날,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솟아나는 진리로…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12-1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0) | 2024.11.06 |
---|---|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0) | 2024.11.05 |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0) | 2024.11.03 |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0) | 2024.11.02 |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0) | 2024.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