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0:6-7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89:34
같은 사실을 놓고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일은 기이하다. 그야말로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데 따른 시각과 견해의 차이일 텐데, 같은 사안이 전혀 다른 해석으로 일갈되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어쨌든 누군가 그 속에 거짓을 말하고 시치미 떼는 일이 실은 그것을 전혀 잘못으로 알지 못하는 죄의 속성과 같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미 18-19장에서 엄숙히 경고되고 금지된 가증스런 악행과 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으로,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죄가 집중적으로 열거되고 있다. 오늘 이를 죄의 유형별로 이분하면 첫째는 우상을 숭배하는 죄이며(1-7), 둘째는 성적 음란한 죄에 대한 것이다(10-21). 그리고 후반부에서 이러한 모든 가증한 악에서 떠나 거룩하게 되라는 하나님의 거듭 되는 명령으로 이어진다(22-26).
죄악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거룩이고, 이는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레 20:2).” 하심은 인신 제사로 유명한 암몬 족속의 가증한 몰렉 숭배를 말한다.
몰렉은 소머리 형상과 사람 몸의 형상이 합쳐진 청동우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와 크게 확산되었다. 후일에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는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유다 왕국의 후기에 이르러 선지자들의 주된 경고 대상도 이 때문이다.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사 57:9-10).”
곧 아직 살만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다고 여기는 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하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렘 32:35).” 이 몰렉 신은 두 팔을 앞으로 쭉 펴고 있는데, 이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 아이를 받기 위한 것이다.
몰렉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살아있는 아이를 불에 달아오른 몰렉의 팔에 얹었다가 불타는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 둘째는 아이를 먼저 죽여서 몰렉에게 제물로 주는 것이다. 세째는 아이를 불타고 있는 몰렉의 양 팔 사이로 지나게 하여 정화시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말씀은 엄위하심으로,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하고 명령하신다.
우상 숭배자에 대한 공개 처형을 이르신다. 돌로쳐 죽이는 것은 히브리 사회에서 가장 극악한 죄에 대한 일종의 사형 법으로 구약 시대에 때 널리 유포된 형벌이다. 그런데 이 형벌 집행은 범죄자와 지연, 학연, 혈연 혹은 증인 등 그 범죄를 유발한 형태와 밀접히 연관된 사람들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연대 책임을 가르치고, 우상숭배의 가증함을 여러 사람에게 교훈하여 범죄 예방의 효과를 거두기 위함이었다.
성경에서 이 처형법이 잘못 사용된 예로 스데반의 순교를 떠올리게 한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8).” 앞서 예수께서 유대인에 의해 돌로 맞을 뻔한 사건도 같은 예이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 8:59).”
곧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1-33).”
흔히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위인들이 권력을 쥐면 그 기준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쪽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사사로운 동정이나 관심이 문제다. 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2-4).”
이에 따로 분리하여 구별하는 것이 거룩이다.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겔 20:38).” 곧 우리가 주를 두려워하고 경외한다는 일은 스스로를 죄에서 멀리하는 일이다. 죽음보다 무서운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시 44:9-11).
설령 사실을 왜곡하고 전혀 다른 시각으로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셈법이 다르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결론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곧 이 땅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의식하며 살고 있는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인데,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7-8).”
둘째 사망에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오늘의 시간이 귀한 것은 아직 살아서 사는 동안에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알고부터 나의 보잘것없는 일이나 이처럼 묵상글을 쓰고, 설교원고를 일주일 내내 정리하고, 의사소통이 어려우면서도 한 영혼과의 교제와 그의 삶을 정돈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이고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기는 하나 낮잠을 자지 않게 우린 서로 도서관을 간다. 오후께 같이 시간을 보내면 그 일이 조금은 수월하다. 다른 하나는 잠결에 일어났을 때 음식을 섭취하는 습관이다. 아이가 고백하기를 배고파서라기보다 늘 그래왔던 것이라 뭐라도 먹고 또 잔다. 그러므로 신체의 문제가 발생한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나는 이 무의미한 대화를 계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같이 도서관에서 두어 시간 어울리다 같이 산책을 하면서 이런저런 저의 마음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나의 일과는 그때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주가 맡기시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침묵하지 않는 것, 말하나마나 했던 소리 또 하는 게 의미가 없다 해도 나에게 다시 그와의 시간은 그와 같이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데 따른 되풀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 33:8-9).”
이는 누구에게라도 같은 것이어서 그렇다고 내가 더 나은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나의 연약함을 주가 아시나니, 그런 가운데 내게 두시는 일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같은 말을 또 하고 하나마나 한 식간을 같이 보내는 데 있어 게을리 할 수는 없다. 그런 가운데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이는 오늘 나로 여기에, 저와 함께 두시는 이의 뜻일 거였다. 내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죄를 죄로 알게 하는 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할 수 있게 하는 일, 그러기 위해 나로 나의 연약함으로 저의 곁에 두시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에게 말하다, 우린 흔히 누구와의 친밀감으로 저의 허물어진 자존감과 그 생명의 가치를 복원하는 데 있어 기꺼이 나로 저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도 사명이다. 그러니까 가령 누가 어떤 문제로 정신과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약물을 복용하고 이를 숨기듯 살아갈 때, 나 역시 그러하다는 데서 저는 안도한다. 이러한 심리는 일종의 자기연민과 같아서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데 있어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돕는 데서 회복된다.
가령 어제도 아이가 같이 걷다 뜬금없이 내게 지팡이를 안 가져오셨는가? 하고 물었다. 그 말 속에는 내가 자신보다 어려워하며 걷는 것에서 마음이 쓰이는 것이고, 그와 같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뭐라도 자신이 할 수 있을 것 같은(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서 바닥을 치는 자신감이 조금은 세워지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묵상하는 말씀이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리하여 나는 누구보다 평안하다는 시인의 고백과 같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그러함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나는 이제 이 심정으로 한 영혼을 마주한다. 저에게 나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대상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것으로 저는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할 수 있다. 결국은 주를 신뢰하고 의뢰함으로 나는 더러 어떠하든지 주가 그리 거기에 두심일 테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말 2:2).”
이에 나는 바울의 고백을 사랑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예전엔 이를 극복하고 은닉하듯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하고 살았더라면 오늘은 이 또한 나에게 맡기신 달란트로 여겨서 누구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음으로 저의 상한 심령이 회복될 수 있다면 이 또한 주의 영광이 될 것을 믿는다.
하여,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시 89:1).
그것으로 나는 업신여김을 당한다 해도,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2).
주가 아신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5-6).
그리하여,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47-48).
이에,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5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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