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전봉석 2024. 11. 9. 00:42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레 21:8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시 90:14-15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 때문에 자신을 더럽히면 안 된다. 영적으로 죽은 자란 도무지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의와 세상의 가치로 그 삶의 기준을 삼은 자이다. 이에 우리는 ‘제사장들’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를 따르고 가르칠 의무가 있다. 주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주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려는 삶이 요구된다. 이에 말씀하시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레 21:1).”

 

할 때의 그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그러함을 말한다. 시체는 죄의 결과이다. 죽음은 죄의 삯이다. 이는 곧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에 죽은 시체와 접촉함은 의식적인 부정을 입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 오염에서 깨끗하여 여호와의 신앙 안에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영적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이다.

 

이에 “너는 그를 특별히 거룩한 사람으로 여기라” 하시는 말씀으로,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레 21:8).” 하실 때에 인간적으로 우리가 일반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때에 우리는 거룩한 자로 존경받을 자로 범사에 조심해야 한다. 제사장의 자격으로 하나님께 각종 희생을 드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때에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구별됨을 받아 이제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룩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거룩하심에 근거하며, 오직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더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그렇듯 우리 곁에 여전하나 더는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이들과의 교류나 그 관계는 절제할 필요가 있다. 실제 우리 안에서 그와 같은 예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 멀리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에,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

 

그러할 때 신앙을 빙자하여 가족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소홀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2-25).”

 

우리가 가정을 이뤄 그 관계를 이어가는 데 있어 주의 사랑과 은총으로 하나 된다. 그러할 때 권위란 구별된 삶에서 나온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서로에게 있어 거리낄 게 없고 자신의 역할에서 충실할 때 다른 그 어떤 교훈도 이보다 못하다. 곧 우리 스스로가 주를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자녀교육은 자연스럽게 그리 전해진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인위적으로 누구에게 보이려거나 혹은 강제하려 할 때 엇나간다. 나는 이로써 하고 싶은 말을 기도로 혹은 말씀을 전할 때 설교로 대신한다. 이에 주가 하실 것임을 믿는다. 나는 다만 그것이 보잘것없다 해도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 주의 마음으로 다할 뿐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흔아홉 마리의 무사한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와 같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이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하실 때에,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26:16).”

 

그러므로 우린 누구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이것으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1).”

 

이 놀라운 사실을 오늘 말씀은 우릴 일깨우시는 것 같다. 더러는 마음이 저 혼자 앞서는 일이라, 때로는 누구와 비교하게 되고 스스로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괜히 혼자 자책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묵묵히 또 오늘을 살아가는 일에서 나는 주의 사명을 깨닫는다. 옆집 노모는 몇 개월 전만 해도 정정하여 자기 혼자 지팡이를 짚으며 산책을 나섰다. 그를 보면서 우리 장모도 저 정도만 되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였는데 어제는 일체 스스로 거동도 못하면서 사뭇 어두운 표정으로 지나쳤다.

 

전에도 잠시 생각하였지만 살아내는 일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연로함으로 인하여 육신의 연약함은 질병으로 또한 고통으로 우릴 괴롭히기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몸부림치며 살아내는 일…. 나의 장모는 자주 침대 끝에 앉았다가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인데 침대 밑에 푹신한 깔판을 두어 행여 엉치뼈가 상할까 하여 그리하였는데, 어제도 그런 상황에서 혼자 몸부림치듯 몸을 뒤척이며 다시 침대로 올라앉는데 그 모습이 눈물겨웠다. 도와드리려 하자 괜찮다고 하면서도 여러 번 뒤척거려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올라앉았다.

 

가끔씩 나는 사는 일이 그 자체로 사역이란 생각을 자주한다. 엊그제 어느 ‘아픈 아이’의 사연을 두고도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며 주가 보내실까 하여 대비하고 있는데, 초중학교를 학폭에 시달리다 이내 고등학생이 되면서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둔 것이라… 행여 아이가 온다 해도 내가 어찌 그의 고통을 나눠질 수 있을지, 생각이 많아지곤 한다. 돌아보면 그야말로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은 죄의 결과로 삶이란 주의 노여움과 맞닿아 있다. 이에 오늘 시인은,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8-9).

 

그로 인하여,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0).

 

나는 이에 따른 덧없음으로 주의 이름을 사무치게 부른다. 나이 들어 연로한 육신으로 당해야 하는 여러 질병을 지고 사는 일에서나, 일찍이 남들보다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아픈 것도 일이라’ 여겨지며 사는 사람이라,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1-12).

 

나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시편의 기도에 가 닿는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3).

 

하여 나의 기도는 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인데… 내 곁의 지적장애나 정신장애에 대해, 또는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 속에 어떤 노여움이 저로 하여금 분노조절장애로 혹은 ADHD 증후군으로 힘들어하게 하는 것인지…. 나는 가끔 길을 걷다 오가는 이들이나 저마다의 시달림을 연상하며 눈물겨울 때가 있다. 사는 게 지옥이라,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하심이 복일진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2-4).”

 

아, 우리가 어찌 이 모든 환난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가 하면,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였으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이래서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3-34).”

 

아, 왜 말씀이 위로이며 진리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늘 나는 어디가 아파서 그것으로 집중하다가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이와 도서관에 앉았다가 채 두 시간도 못 돼 서성거리며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는 것도… 연약한 육신을 뉘어 뜨거운 온열기에 몸을 지지고 있을 때의 서글픔에 대하여,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그러하여 할 수 있는 한 아이를 만나 도서관에 가고, 여러 대화를 하다 아이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어 미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고 보면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나의 약함으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루의 일과를 살아내는 일, 나의 아흔둘 장모의 하루나기가 눈물겨운 것은 그 때문이다. 모두가 어디가 아프거나 무슨 일로 그 마음이 어려움에 처해 사는데, 아내는 가끔씩 이제 6학년이 ‘똥싸개 아이’를 두고, 중학교에 가면 겪어야 할 일을 두고 안타까움에 혀를 찬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도 족저근막염으로 고통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겉사람이 낡아짐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가?’ 하는 데서 하루를 점검하듯 주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에,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90:1, 4).

 

그리하여,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4).

 

이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