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전봉석 2024. 11. 25. 22:2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민 11:4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8-9

 

 

문제는 여전히 우리 안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 곧 하나님의 속성에 반기를 드는 감정이나 습성인 것 같다. 영적으로 ‘출애굽’은 하였으나 같이 나온, 내 몸에 밴 습성이 있어 툭하면 세상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판단하고 주관하려 한다. 곧 이때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이를 인정하나 이를 떨쳐낼 수는 없는 것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1-23).”

 

그때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는 돌아서기 무섭게 혈기가 또는 격한 감정이 일어 이를 스스로 주체하기가 어려워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바울의 절규가 곧 오늘 우리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인정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나의 나 된 것을 주 앞에 아뢸 때 주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하여 ‘섞여 사는’ 내 안의 나로 늘 나로 하여금 먼저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려 감사를 소실하게 하는 성질이기도 하다. 그것으로 탐욕을 품어 필요 이상의 것을 구하게 되어 남을 부러워하고 자신을 업신여기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이런 일이 너무 잦다. 그러고 난 뒤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으로 한동안 기도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도 얻기 힘들다. 분수에 넘치는 것을 무리하게 취하고자하는 마음으로 헛발질을 하듯 시험에 들기 일쑤다. 이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는 처음 죄가 들어올 때도 같은 마음이어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그러니 욕심은 끝내 죄와 죽음을 불러오는 파괴적인 욕망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는 오늘 내 안의 ‘섞여 사는, 나’로 인하여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하며 애굽을 그리워하는 꼴이다. 몹시 한탄하며 과거에 즐기던 것을 그리워하다 비관하기도 하는 일인데, 이는 오늘의 감사를 앗아간다. 현재의 생활에서 비관하고 낙담하게 한다. 돌아보면 ‘애굽’에서 어울려 생활할 때 뭐 그리 대단히 좋았던 것도 아니면서 문득 그리움이 사무칠 땐 현재의 감사를 잃고 비관하게 된다.

 

이에 극단적인 것이 치매가 아닐까 싶다. 오늘은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늙으신 장모가 뜬금없이 언제 적 이야기를 꺼내면서 며느님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둥 오지 말라 그랬다는 둥 하는 소릴 하여 아내와 나는 놀랐다. 수십 년 전의 일과 오늘의 일이 중첩되어 마치 엊그제 그랬던 것처럼 말을 하는데, 누가 뭐라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할 말을 다 하시는 것이다. 식탁에서 자꾸 다그치는 아내의 발을 슬쩍 차고, 나는 장모가 하는 말에 장단을 맞추듯 듣다 어르듯 달래 얼른 식사하시고 예배드리자고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치매가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오줌을 지리고도 그대로 옷을 입은 채 벗으려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엉뚱한 소리로 느닷없는 생각과 말의 맥락이 닿지 않는 것도 그렇고… 한동안 중단하였던 치매 약을 다시 처방받아 드시게 하자고 하고 어찌 말을 돌리게는 하였는데…. 그 증상이 죄의 속성과 흡사하다. 문득 예전 일, 어떤 미련이 또는 앙금이 남았던 마음에서 말이 쏟아져 나온다. 생각과 말이 닿지 않아 본인도 그 말을 왜 하는지 모르면서도 끝까지 이어가려 고집이다. 아내의 성화에도 장모는 꾸역꾸역 할 말을 다 하느라 저녁 식탁이 길게 이어졌다.

 

우리 안의 섞여 사는 무리, 혹은 우리의 속성이 그러하여서 불평과 원망으로 우리 마음은 느닷없다. 이에 백성들의 진을 불로 징벌하신 다베라 사건(1-3)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만나’에 대해 어느새 싫증이 난 것으로 고기타령을 하는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이 어이없게 여겨진다. 하늘의 신령한 만나로 풍족한 은혜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또 싫증이 또는 어이없는 그리움이 일어서 우리의 타락과 배반은 작은 불평이나 엉뚱한 그리움에서 비롯된다.

 

나는 곁에서 서서히 치매가 오는 것 같은 장모의 엉뚱한 말과 늘 똑같은 푸념이나 옛날 타령이서 죄의 속성을 느낀다. 어떤 그리움 혹은 마음의 서러움이 죄로 남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무너뜨린다. 이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결국 오늘의 감사를 상실하면 그동안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만족함을 잃게 한다. 만족함이 사라지면 감사도 없어진다. 감사가 사라지면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예전의 욕망에 휩싸인다. 왜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하시는지 알 것 같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범사란 어떠하든지 매순간이다. 그런데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뜬금없이 며느님이 자신을 미워하여 그런 소리(예전에 들었다고 우기는 장모의 주장)를 했던 것이라며,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서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니 친정엄마라 수월할 거라 여겼던 것이 아내의 수고를 보면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느낀다.

 

늙으신 장모의 상태도 그렇지만 아내가 더 빠르게 그 성격이나 말투가 변해가는 것 같아 무섭다. 그러니 거동은 불편해도 정신은 온전하여서 그동안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하고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다.

 

오늘 본문에서 ‘다베라의 원망 사건’은 상징적으로 읽힌다(1-3). 법궤를 앞세우고 위세당당하게 진군하던(10:11-36) 이스라엘이 1년 남짓 광야 생활로 싫증이 일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해지면서 느닷없이 ‘은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만나’를 불평하다, 출애굽을 원망하고 애굽의 때를 그리워한다. 이에 하나님은 경고의 불을 백성들의 진 가장자리에 내리셨다. 그때 모세가 간절한 마음으로 중보한다.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은 불을 거두셨다. 모세는 이에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하였다.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기다. 나는 여기서 모세의 중보 기도를 보며 그 중요성을 생각한다. 곧 야고보는 이에 대해,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하고 엘리야를 예로 든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17-18).”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19-20).”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으나 치매를 생각하다 ‘섞여 사는 우리 안의 속성’을 떠올리게 되고, 죄란 곧 그와 같아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난 일을 떠올리게 하고 그리워도 하게 하다, 원망하게도 하다, 아쉬움과 서러움으로 기억 저편의 어떤 일과 현재의 일을 혼재하여 뒤섞음으로 오늘의 감사를 앗아간다. 이를 나는 나의 늙으신 장모에게 어찌 설명할까, 하고… 가정예배 때 우리가 같이 읽은 사도행전 2장을 설명하였다. 곧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기를, 성령의 감동으로만이 우리가 감화되어 ‘어찌할꼬!’ 하며 회개의 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같이 예배를 드리며 내가 설명을 할 때는 장모가 말을 멈추고 가만히 듣는다. 옛날 일을 떠올리며 자꾸 예전의 시간으로 자신을 끌어가지 말고 오늘의 감사로 장래의 소망에까지 이르기를 바라였다. 안 믿는 두 손자와 두 여동생 분들과 본인의 남은 생애을 두고 기도하시라, 성령을 구하시라, 덧붙여 성경암송을 하시라 하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이를 두세 번 같이 읽으며 다음 날 외우자고 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 은혜밖에 없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사실 우린 누구나 다 패역한 시간을 살아왔다. 우리의 오늘도 모두가 은혜의 소산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이를 우리가 되새길 때, 지난 날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심지어 오늘의 형편과 사정이 어떠하든지,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때가 좋았지, 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 않는 길은 오늘의 말씀을 붙드는 것뿐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곧 심판주가 우리 문 밖에 계신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원망과 불평의 결과는 눈물겹다. 그러므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3-14).”

 

돌아보면 예전의 우린 누구라도 구제불능이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그럼에도 오늘 역시 우리 안에 ‘섞여 사는’ 우리 안의 무리가 있어 이것들이 혼합되어 여전한 ‘수많은 잡족’을 이루어 오늘도 우리를 지배한다. 이에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우리의 어쩔 수 없음에도 주가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부디 이를 붙들고 하루씩 매순간마다 주의 은혜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 107:1-3).

 

이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15, 21-22).

 

부디 우리의 남은 생애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31-32).

 

그리하여,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