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전봉석 2024. 11. 27. 06:26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 12:3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 108:13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 구스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 반도 및 앗시리아 지역 등에 널리 퍼져 있는 검은 피부의 함족 계통이다. 모세의 아내가 된 구스 여인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모세가 소명을 받기 전 도피 생활에서 이루어진 오래 전의 사건을 놓고 새삼 미리암과 아론이 문제 삼았을 리 없다.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의 사망 후 재혼하였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문맥상 타당한 듯하다. 유대 전승에서도 모세는 출애굽 시 함께 탈출해 나온 잡족 가운데 한 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을 것이라 한다.

 

어쨌든 이를 두고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리암만 징계를 받은 것은 미리암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아론이 이에 소극적으로 동조한 것 같다. 그들이 모세의 결혼을 두고 비방거리로 삼은 동기에 대해, 이방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 통혼을 금지하셨다.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6).”

 

또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신 7:1).”

 

그렇다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아예 금지시키신 것은 아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창 48:5).” 하고 요셉의 아들을 인정하심과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룻 4:13).” 모합 여자 룻을 허용하신 사실도 있다.

 

느헤미야 13장에 강조되고 있는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는 그 결혼이 가져올 종교적 타락(우상 숭배)과 도덕적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자체로 절대적인 법은 아니다. 선민으로 민족적 우월성과 배타성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그 종교적 자긍심보다 우월 의식에 사로잡힐 때 질책을 면치 못했다.

 

그 무엇보다 오늘 미라암과 아론의 질책은 모세에 대한 그들의 교만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 12:2).” 자신들의 위치와 그 의지로 모세를 비판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하는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은 월등한 모세의 지위와 탁월한 권위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한 것이다.

 

미리암은 여선지자 자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기도 했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출 15:20-21).”

 

아론은 우림과 둠밈이 부착된 판결 흉패를 입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도 했다. 또한 모세와 더불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였다.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출 28:15, 30).”

 

그러나 그들의 지위나 사명은 하나님께로 부여받은 바, 모세의 직접적인 신정 정치에서 모세만이 가지는 특수한 권위와 중보자로서의 자격과는 다르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출 4:16).”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세에게만 독특하게 주어진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이는 우리의 행동과 사고 전체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한다. 이 사건의 정확하고도 공정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실 때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여기서 온유함은 자기를 낮춤, 괴롭힘을 당함, 겸손함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세가 온유했다는 말은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에 대항치 않고 감정을 억제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묵묵히 참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다는 의미다. 자기 절제는 인간의 본성적 기질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즉 당시 모세의 온유함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이것은 모세 스스로 그리 표현하는 게 아니라, 성경이 이를 인정하심이다.

 

앞서 애굽을 그리워하며 ‘맛있는 음식’을 회상하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을 때 지도자 모세는 괴로워했다.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를 비웃었던 백성들을 결국 하나님이 재앙으로 심판하실 때도 모세는 주 앞에 중보하였다. 오늘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실을 두고 비방할 때 하나님은 미리암을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고, 아론은 이를 개탄스러워하였다. 그때마다 준엄한 징벌을 받는 장면이 제시되고, 그때마다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 울부짖으며 기도하였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변호하신다.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었다.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한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인간과 하나님을 동시에 비방하는 과오를 범했다. 이때 미리암의 문둥병은 그들의 시기와 질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럽고 죄악 된 것인가를 여실히 증명해한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길,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더불어 상대의 허물을 힐책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피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가르쳐주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에서 누구에 대해 비방할 일이 있으면 먼저 공의로운 심판자 하나님께 아뢰고,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19-20).”

 

하나님의 일, 그 일을 맡아 하는 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그러므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고전 4:1, 16:16).”

 

하여,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역설적으로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또한 그 결과나 성과가 어떠하든지 우리로 주만 바라게 하신다. 어제는 체한 것인지, 오전에 먹은 약 때문이었는지, 오후 내내 어지럽고 울렁거려 힘들었다. 첫눈이 요란하게 내리는 새벽에 주의 은혜로 몸이 안정이 되어 교회로 왔다. 그럴 때 보면 나의 생각에는 ‘묵상글’을 어찌해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어지럽다. 이 일이 나에게는 그만큼의 책임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오늘 아침은 또 아이와 성경공부가 있는 날인데, 혹시 몰라 어제 저녁에 미리 연락하여 하루 늦춰 다음 날 아침으로 하기로 했다.

 

비록 나의 하는 일이 부족하여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으나 나로 하여금 주를 생각하며 이를 막중한 임무로 알게 하시는 것이다. 곧,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하여,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아픈 것도 일이라고 나는 그 와중에 주의 일을 생각하며 어찌해야 하나, 하고 몇 차례 깨었다가 새벽에 주 앞으로 나왔다. 곧 나의 허물과 연역함은 주의 일을 행하는 데 있어 걸림이 될 수 없다. 주의 일은 주의 은혜로 한다. 그러므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7).”

 

주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그러므로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2-3).”

 

나에게 부여하신 한 날과 나의 연약한 몸과 그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시 33:13-14).

 

이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108:1-2).

 

이는,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4).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