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

전봉석 2024. 12. 5. 22:18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 21:9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2

 

 

우리는 승리한다. 지더라도 승리할 것을 알고 싸운다. 비록 일부 병력이 포로가 되었으나 승리의 자신감으로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 있다. '아랏'이 광야의 작은 소국이었으나 광야를 터전을 살던 무리이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가 이길 것을 알고 싸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알고 싸우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그런 내용으로 시작한다.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잡은지라(민 21:1).” 그러하다 해도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2).”

 

이에,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신 3:22).” 이 얼마나 힘이 되고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싸우신다! 그렇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우리는 바로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이다.

 

일련의 사회 현상을 보며 저마다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것 같은 갈등과 반목 사이에서도 우리는 의연하여 어느 쪽으로도 기울기보다 주를 경외함으로 정의를 바라는 것이라,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하여 우리는 기도할 뿐이라.

 

하여 우리는 실패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실패도 믿음으로 극복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소망을 가지고 산다. 흔히 우리가 신봉하는 민주주의라 하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가, 하는 것을 일련의 사태로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최소한 45년 전으로 퇴행하는 현실을 보면서 새삼 우리가 일궈온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보게 된다.

 

그렇듯 유행이 도는 것처럼 누가 또 공공신학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이를 어찌 대해야 하는지 어렵다. 그 뿌리는 해방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시민신학으로 이어져, 자본주의가 갖는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교회가 나서야 한다는 개념으로 혼재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와 같은 논의가 무의미한듯하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의 해방은 사회로부터가 아니라 죄로부터 시작한다. 고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결국은 믿음의 문제이고 이와 같은 싸움은 영적인 것으로 사회적 합의나 서로의 화합을 위하는 게 아니다.

 

가령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예수님이 그 시대의 사회 현상이나 어울리던 사람들, 문화나 저들 형편을 두고 씨름하여 다투신 게 아니다. 바울은 일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한 마디로 오늘 우리의 현실은 좌우의 대립도, 기득권의 싸움도 아니다. 비록 불가능한 것 같고 작아서 보잘것없는 것 같아도,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1-22).”

 

주가 이루실 일이다. 그럼에도 우린 항상 어떤 일에 먼저 불평과 원망으로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민 21:3).” 하여 금방 승리하였었는데,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4).” 그렇게 되자 돌연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5).”

 

아, 결국은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6).” 왜 우린 늘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서로의 화합과 타협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구조의 우리 사회현상은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같다. 미국도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고 저의 유별난 성향으로 전 세계가 다 들썩거릴 정도로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게 다 출렁거린다.

 

신학은 본래 사회에 적응하거나 저항한다. 성경은 이에 대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런데도 사회와의 화합을 도모하는 신학이란 다소 의아하다. 해방신학 시절에는 이념의 갈등과 정치적 종속으로 교회가 싸워야 했고, 오늘에는 문화적 갈등과 경제적 속박으로부터의 싸움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민중신학이 오늘이 이르러 공공신학으로 시대에 참여하고자 한다. 어쩌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외치기보다 사람들의 인생살이와 그에 따른 불균형으로 오는 저항에 함께 해야 하는지…. 나는 이러한 주장이나 학문적인 연구에 관심도 지식도 부족하여 선뜻 뭐라 의견을 얹기가 두렵지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하는 말씀으로 주춤, 그러한 우리의 관심이 바른 것인지 회의적이다.

 

분명,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더러 우리를 폐쇄적이라든지 이기적이라 한다 해서 주저할 게 아니다. 문제는 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에 우리가 성령으로 행한다 하는 것을 사회구성원들에게 무슨 수로 설득하고 납득시키겠나? 다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이란 대부분 의롭다 하나 악하고, 선하다 하다 죄인 것뿐이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를 인정할 때,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7-8).”

 

그럴 때면 항상 주님은 용서하시고 또 살 길을 내어주사,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9).”

 

이를 또한 믿음으로 보는 자만이 산다. 결국,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신 7:19).”

 

이에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 15:15).” 내가 이처럼 묵상글쓰기를 하며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찾아서 그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와 함께 하셨는지를 되새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럴 때 오늘의 여러 상황과 여건이 더러는 감당하기 어려울지라도 주께서 또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심인데,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오늘의 나의 의나 선이란 그리 여겨주심으로 나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으로 가능하여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9-10).”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십자가, 구주의 보혈이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를 어찌 일반론적으로 하여 사회에 접목시킬 수 있을까? 또는 나름의 선과 의로 대체할 수 있을까?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하여 우리는 ‘우리’로 묶으시고 성도라 하심으로 교회로 부르신 데 따라,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할 때에 우리는 모세에게서 중보하는 기도자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순례자로 지나가는 자들이다. 저들 속에서 저들 문화에 흡수되거나 융화되어 하나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곧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6).” 하며 기도하여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소망으로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하여 우리의 본향은 이 땅에서의 것이 아님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바울 사도의 이 놀라운 증거로 우리의 발걸음도 그와 같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는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2-3).”

 

하여,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아, 이 귀한 진리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19-20).” 곧 오늘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영원한 처소는 저 하늘에 있음을 알고,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시 117:1).

 

이는,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