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민 22:12, 20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7
원망과 불평으로 불뱀의 시련을 받았던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랏, 아모리, 바산 등의 이방 족속들을 무찌르며 가나안 앞 모압 땅에 진을 친다.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했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심히 동요한다. 발람을 불러 저들을 향한 저주를 명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술가 발람의 입술을 통해 미래에 도래할 당신의 나라와 그 나라 왕에 대해 계시하기까지, 이 모든 길을 열어두셨다. 이러한 발람 사건의 서두를 장식하는 오늘 내용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이 그들을 격퇴시킬 생각으로 브돌의 거짓 선지자 발람을 초청하였다(1-6). 이에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절하였다(7-14). 그러나 다시 자신을 부르자 물질에 대한 미련으로 모압으로 향한다(15-20). 모압으로 가는 발람의 행로에 하나님의 사자가 가로막고 서자, 저의 나귀가 가던 길을 멈추어 주인 발람을 책망한다(21-30). 결국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이르는 말을 전하게 하고 보낸다(31-35). 모압에 도착한 발람은 발락으로부터 큰 환대를 받는다(36-41).
성경은 발람을 ‘불의의 삯을 사랑한 자’로 규정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 그 길은 결국 ‘어그러진 길로 간 자’이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어느 소설가는 사람이 위대한 것은 가던 길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나는 일련의 사태를 보며 암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의 사회 제도란 얼마나 허술하고 무익한가, 하는 생각을 한다. 흔히 서로 당을 지지하며 어느 쪽으로 편향된 시각으로 옳고 그름을 논하는데, 교회와 믿는 자의 분별은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물음에 부화뇌동하여 좌로도 우로도 치우지지 말아야 한다.
가정예배를 드리다 이 사태를 묻는 말에 본래 우리는 신정통치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것을 주변국들과 같이 왕을 원하게 되어 이스라엘도 왕정통치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다 공회가 구성되고 엄밀하게는 사도행전 시대에 공산주의와 같이 모든 것을 공유하여 서로 합하였던 것이 민주주의라고 하는 자본주의의 허울 좋은 제도를 이룩하여 다수주의로 정착되었다. 흔히들 공산주의를 사탄의 정권이라 하는데 민주주의는 아니 그러한가? 공산주의니 공리주의니 하는 제도 역시 그 취지는 이상적이었다. 민주주의 역시 근현대사에 가장 유력한 사회제도로 정착되었는데, 그럼 이는 또 성경적인가?
나는 소위 기독교인들이 정치활동을 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우린 그 일어난 상황과 사실만을 놓고 분별하면서 주의 선하심을 구해야 한다. 정치적인 성향으로 상대 쪽을 비판하거나 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나름의 판단과 기준으로 독일의 ‘본 회퍼’ 목사와 같이 히틀러 암살단을 조직하여 암약할 정도로 정치적인 것에는 그 어떤 이유로도 성경에 어긋난다. 그렇게 히틀러를 암살하려 활동하다 저는 히틀러가 죽기 며칠 전에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의 현실 참여(?)를 운운하는 자들의 시각에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예수님이 병든 자들과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서 제도권 내의 외식하는 자들을 힐책하셨지만 이를 사회 운동으로 보는 것은 반성경적이다. 그런 시각으로라면 예수님은 좌익이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러하여 그리스도교도들을 색출하여 잡아들이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 시절 현실적은 시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좌파이고 반사회적운동가였다. 사울의 열심은 정당하였고 바울 되기 전까지 저는 이를 율법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그의 신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
이번 주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 구절을 두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오늘 우리의 현실과, 수천 년 전 이스라엘이 신정통치를 거부하며 왕을 요구하던 것과 오늘 날 다수가 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이를 가장 이상적인 현실의 제도로 여기는 데 따른 한계를 설명했었다. 성경의 교훈은 다수결의 원칙이 가져온 것은 불순종으로 광야 40년을 떠돌아야 했던 비극적인 교훈이 대표적이다.
결과적으로 우파든 좌파든, 모든 인간은 다 주의 심판을 향해 진행할 뿐이다. 이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결국 40년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더하시기 위하여, 이를 이룩하는 데까지 결코 멈출 수 없는 진행이었다.
독재자의 나라든 자유민주주의 국가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전진한다. 그러다 모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이때 우리 믿는 자들은 저들 앞에서 지표가 돼야 한다. 곧 우리는 저들에게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권위를 상실한 것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 있고, 교회가 사회에 끌려 다니고 목회자가 정치나 지역사회에 부합하려 이리저리 휩쓸려서 그렇다. 오늘 본문에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의 진행에 두려워했다. 38년 전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을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광야 40년의 진행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에 따른 신정통치의 결과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느냐, 주저하고 의심하느냐 하는 차이가 이렇게 크다. 왜들 사회문제에 교회가 결부되어 이쪽이냐 저쪽이냐 편을 가르고 나뉘는지 모르겠다. 교회는 목사 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회참여 좌우를 가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저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바로 서야 한다.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출 15:14-15).”
결국 우리가 서로 어느 쪽이냐, 하며 정치적으로 성경을 재해석하거나 부당하게 적용하여 멋대로 주장할 때,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당시 부당한 정치에 의해 실패한 결과가 된다. 사회구원이니 현실참여니 운운하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을 사랑하라’ 하심을 적용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몽상가의 희극적은 죽음은 없다. 분명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부조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선각자가 아니다. 민중운동가도 아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하는 소리가 사회에서 교회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이는 곧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대상 14:17).”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권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계만방에 알게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공의와 심판으로 이 땅에 임할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이는,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4-15).”
우리가 받은 예언은 성경이다. 말씀에 입각하여,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그러니 여기서 왜 성경 아닌 다른 주장과 해석에 열을 올리거나 귀를 기울여서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인지….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뜬금없이 선관위 세 곳으로 군 병력이 대거 투입된 것이 어느 극우채널의 끝없는 허위선전에 의한 것이라는 보도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어설프고 유치한데, 그 정도로 우리가 공고하게 여겼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술하고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발락이 어처구니없게도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제압하려 여호와께 기도하게 하려는 발상이 우습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압을 해롭게 하지 말며 저들과 싸우지도 말라고 경계하셨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9).” 그러나 어리석게 모압 왕 발락은 극심한 공포로 복술가 발람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전멸시키려는 무지한 계책을 세웠다.
발락이 대항하려 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민족이다. 곧 우리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구별된 사람들이다! 이를 저버릴 때 사회현상에 휘둘려 문화적으로 끌려가고, 사회적 현상에 교회가 앞장서서 좌지우지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동안의 일처럼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일생을 행군하는 삶을 산다. 그런데 왜 자꾸 사회를 의식하고 허울은 좋은데 실상은 그들의 권세나 재물에 현혹되어 불려 다니는 것인지… 이런 와중에 모 장로님이란 정치가가 나서서 극우채널 이상의 극단적인 발언으로 자기 뜻을 표현하질 않나, 교회가 일명 ‘태극기부대’에 합류하여 찬송하고 예배하며 길거리로 나가는지…!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우린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순례자이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16:11).” 이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하여 나는 누구와의 대화를 피한다. 저와 특히 정치 이야기나 성경 이야기를 자제한다. 정치야 그렇다 치고, 목사가 성경을 전하는 데 있어 피한다는 게 다소 마음에 걸리고는 하지만… 듣지 않는 자기 식의 아집으로 성경을 운운하는 자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1-3).”
성경은 논쟁의 주제가 아니다. 교회는 사회에 적응하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적응한다면 말씀은 철학과 윤리와 도덕과 세상 학문들과 나란히 연구 대상으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우리가 저들 앞에 내세울 수 없다. 성경은 일체 우리의 의견을 구하거나 동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말씀은 일체 우리의 판단이나 기준으로 좌우될 수 없다. 성경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가 아니면 읽거나 듣거나 이를 이해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그러느니 나귀의 눈을 열리고 입이 열러 선포됨이 옳다. 우리가 외치지 않으면 길가의 돌들이 외칠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여러 주장과 사상과 그에 따르는 무리가 동조하며 안개처럼 쓸려 다닌다 해도,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이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저마다 옳다고 자기 신념을 따르지만,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이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1).
이는 불변한 진리다. 그러므로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
그리하여,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5-6).
이에 나는 어지러운 날들을 지켜보면서,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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