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전봉석 2024. 12. 7. 21:55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민 23:19-20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시 119:28-30

 

 

이스라엘이 전진해 오는 것을 보고 모압 왕 발락은 위기를 느낀다. 그 나머지 브돌의 복술가 발람을 데려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발락이 데려온 발람이 이스라엘을 향해 저주를 못하고 축복한다. 이때 발람이 비록 복술가로 거짓 선지자이나 예언하는 순간은 성령의 강권하심에 사로잡힌 것을 알 수 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이럴 때 발람이 주께 쓰임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저를 귀히 여겨야 할까?

 

나아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애굽의 바로를 주께서 종이라 하시고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주의 뜻에 따라 저를 사용하셨다. 그렇다고 저를 주의 종으로 여겨 우리가 옳게 여겨야 할까? 더 나아가 그럼 모세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인가? 바울은 우리와 다른 성정을 가진, 소위 말해 의인의 반열에 있는 성인(聖人)인가? 그리 여겨 저들을 섬기듯 높여 우러러야 할까? 모세나 바로나? 바울이나 발람이나?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성경의 관점은 모두가 다 죄인이다. 그럼 모세와 바로가 다른 것은 주를 인정하고 주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외하고 안 하고의 차이다.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7:21).” 이와 같은 차이다.

 

일련의 사태로 오늘 오후 내내 뉴스를 틀어놓고 대통령 탄핵 여부를 지켜보다 교회로 왔다. 이 땅의 모든 권세를 주가 주셨으나 그렇다고 저들을 우리가 받들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저들을 존중하는 것은 저를 그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자 하여 이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상대가 그릇되다 하면 이쪽은 옳은가? 주장하듯이 범죄자로 재판을 받는다고 운운하는데 그렇듯 털면 자신들은 깨끗한가?

 

요즘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이 꽤 큰 교훈을 준다. 그 어떤 역사책보다 귀한 가치를 보고 느끼게 한다. 먼저는 저마다 다 죄인이란 것이다. 발락이 오죽하면 발람을 데리고 여기저기 옮겨가며 저주를 해달라고 하겠나? 오히려 발락의 그와 같은 신앙이 가상하고 갸륵할 정도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저주가 있으면 이스라엘을 상대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겠나?

 

오늘 내용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발락과 발람이 메소포타미아의 풍습(신 23:4)에 따라 일곱 제단을 쌓는 장면이 나온다(1-6). 그리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한다는 발람의 첫 번째 예언과 그에 대해 발락의 답답함(7-12), 두 번째로 일곱 제단을 쌓는 장면(13-17),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의 위용을 그 내용대로 말할 수밖에 없는 발람과 이에 분노하는 발락(18-26), 다시 또 발락이 브올 산 꼭대기에 제단을 쌓는 장면(27-30) 등.

 

당시 각 지방마다 신(神)들이 있어 다른 지역 신의 존재도 인정하는 이른바 다신교(多神敎) 신앙을 보여준다. 각 신들의 능력에 따라 신의 우열을 가렸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삼상 5:1, 3, 5).”

 

이러한 생각으로 발락은 발람의 복술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바라는 저주의 메시지는 번번이 차단되었고, 발람의 입에서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선한 메시지만 쏟아져 나왔다. 이는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신이시며, 모든 존재들을 친히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재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6).”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결코 이대로 위기 상황에 두고 방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모든 사건과 상황을 지배하시며 평안으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자로 행복한 증거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각자 저마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고 하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선하심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3-34).” 고로 오늘도 우린 의연하게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불의한 일에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땅의 그 무엇으로든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5-36).” 이와 같은 확신과 열정으로 우린 언제나 주 앞에서 주만 바란다. 그러할 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7-39).”

 

하여, 발람을 보면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궁벽한 소행을 보고 배우게 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곧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의연하게 대처하며 사는 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이는 주의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일이다. 말씀으로 굳건하지 않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온갖 유튜버의 극단적인 주장이나 왜곡된 성경연구에 골몰할 수 있다. 저들의 세계관은 성경의 것과 다르고, 성경과 다른 것일수록 설득력과 타당성이 뚜렷하다. 이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19-21).”

 

하여 오늘 시편의 서두에서,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9:1-2).

 

곧 우리의 복은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에게 빛과 소금의 삶이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우리가 세상과 다른 것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말씀을 두고 이를 따라 살려고 할 때,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9-10).

 

우린 다만 주의 말씀을 지킬 따름이다. 곧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신 6:18-19).” 그러므로 우리가 성량한 일을 행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함이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아, 이 놀라운 신앙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나의 못난 자아가 늘 세상을 향해 시선을 두기 일쑤고 저들처럼 살고자 하는데 급급하여서 전전긍긍하기 일쑤인데,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하여 나는 이처럼 주의 전으로 오는 것으로 평안을 삼는다.

 

이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1:1, 106:3).

 

할 때에 우리가 오늘의 사회 현상에서 자신들의 판단과 기준으로 ‘너는 어느 쪽이냐?’ 하여 한 쪽을 지지하고 상대를 적대시하는 게 아니다. 저쪽은 이래서 틀리고 이쪽은 이래서 옳다는 식의 판단은 금물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29:2).

 

사는 게 곧 예배다. 오늘 한 날의 행실이 거룩한 옷이다.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길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언제나 주를 두려워한다. 세상은 두려울 게 없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그러므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31:19-20).

 

내가 주를 바랄 때,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33:8).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핵심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하심으로 오늘 우리는,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119:11-12).

 

그리하여,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15-16).

 

할 때에,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4, 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