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전봉석 2024. 12. 3. 22:06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민 19:2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시 115:11, 15

 

 

부정은 전이된다. 부정한 자와 같이 한 자도 오염된다. 오늘 본문은 죄의 강력한 전염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완벽한 성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우리의 연약함은 송두리째 드러난다. 우리의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항상 주 앞에서 온전할 때에 스스로 자신의 죄의 멍에를 지지 않는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

 

결국 우리 죄를 구주의 십자가에 내어놓을 때 우리는 자신의 멍에를 지지 않는다. 하여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 8:46).” 결론은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면 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하면서 성경을 따지고 말씀의 이치를 운운한다. 정작 우리 인간이 과학으로는 통계로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미력하여서 무엇으로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하여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이를 인정하는 데서 자신의 주장과 생각에서 놓여날 수 있다. 어제는 이런 내용으로 한참을 누구에게 설명했다. 더욱이 이제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오고 이런저런 사정이 어떤 결정을 유도하고 있음을 알겠는데 저는 한사코 ‘혹시나’ 하는 기대와 마음으로 그 마음을 미룬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말하길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복종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는 그 어떤 징계도 하나님은 감수하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행여 주의 선택받은 자로 주 앞에 세우시려는 데 있어 우리가 이내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이를 거부하거나 외면하면 하나님은 꾸짖어서 판단하시고 심지어는 징계하심으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신다. 이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곧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에이, 설마… 하고 여전히 미적거리며 농담으로나 듣는 이에게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하물며 피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포기하실 리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이를 알고 인정하면서 우리는 남은 생을 주께 드리고자 한다. 더는 날 위해 살던 삶에서 놓여나길 원한다. 언제까지 먹고 사는 문제로 씨름하다 병들고 나이 들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는 없다. 곧 우리의 정결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최소한의 마음이다. 이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에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주께 나아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여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이에 그 길은 오직,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그러므로 우리는 확고하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저마다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고 나름의 주장과 견해로 성경을 논하고자 하는데 있어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은 성경이 두 쪽이 나지 않는 한 확실하다. 누구는 선을 찾고 의를 구하여 의로운 삶을 강조하고, 누구는 서로의 화합을 운운하여 사랑타령을 하곤 하는데, 사랑은 이것이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그리 믿어지는것으로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긴가민가하여 언제까지 양다리 걸치듯이 이쪽도 저쪽도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결국 우리로 의롭다 하심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가능하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나는 이제 그러므로 자유하다. 내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죄를 대속하신 이로 말미암아 더는 그 멍에를 메고 살지 않아도 된다. 그런 가운데서 또 다시 죄를 짓는다 해도 그것까지도 주가 속량하셨고 이에 따른 대언자로 우편 보좌에 계시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항상 용서를 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그렇게 누구와 성경공부를 할 때 저에게 성령을 구하라 하고 나는 그 말을 성령으로 하고 있는가? 하고 되묻고는 한다. 우리가 주께 쓰임 받고자 하는 자원하는 심령이 복이 있어서,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출 35:21).” 그 마음을 주셔야 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2).

 

이를 구할 수 있는 수준의 마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강조하고 또 설명하여도 저가 이를 받지 않을 때, 나는 속상해하다 나로 인하여 주가 참고 또 견디셨을 생각을 하다 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이와 같은 마음을 주가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이를 인정하는 데서 나의 전부가 주의 것임을 알게 된다. 퇴직을 놓고 고심하고, 그러자니 다른 일을 도무지 할 게 없어서 걱정이고, 그러다 다시 또 한 해를 더하여 어느덧 나이가 저물어가고 있는데… 나는 꼭 그게 좋다, 나쁘다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분을 안다. 저는 나이 환갑을 훌쩍 넘겨 신학을 하였다. 다들 그 나이에 무슨 일인가? 하고 말렸지만 저는 육십 중후반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렇게 교회를 개척하고 남은 생을 말씀을 전하다 돌아가셨다. 남들은 뭐라 하든지 저는 자신이 받은 그 은혜가 너무 귀하였다. 더는 자세한 사정이나 상황을 듣지 못해 뭐라 할 말은 없으나 그 마음에 넘치는 은혜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것 같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2-14).”

 

곧 우리는 저마다 주가 주신 자신의 생을 산다. 이를 자신의 것으로 여겨 사는 이도 있고, 그리하여 주의 것임을 알고 때가 어떠하든지 주 앞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이도 있다. 그 사역이나 직분에 대해 남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떤 이는 한 교회에서 평생을 시무하다 늙어가고 누구는 부지런히 여러 교회를 옮겨 다니며 늙어간다. 누구는 말씀으로, 누구는 찬양으로, 누구는 섬기는 일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주체할 길 없어 자신을 내어주는데, 결국은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다만 나 역시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운데 해야 할 일을 감당할 따름이다. 아이가 성경을 보내왔다. 이를 여러 번 읽고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바울이 고백조로 말한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 바울은 율법을 잘 알았다. 율법의 각 조문에 대해 알고, 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누구 못지않게 자신 있게 일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하고 나중에야 고백한다.

 

곧 그리스도를 알기 전,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늘 은혜가 아닌 죄와 씨름해야 했다. 아무리 계명을 지키고 의롭게 살려 해도, 그럼 그럴수록 자신의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하고 고백한다. 즉 계명에 따라 살면 살수록 죄가 자기 속에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목격할 뿐이다. 곧 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만을 깨닫게 된다.

 

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알았다.’ 곧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과 복의 근원’이다. 이를 지킴으로 생명을 얻는다.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겔 20:11-12).” 그런데 그렇듯 애써도, 율법의 진정한 정신, 곧 하나님의 의를 닮아가는 것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 3:23-25).”

 

그리하여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즉 계명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으려다가는 자신의 죄악된 속성에 눌려 죽을 판이다. 즉 누구도 계명을 지킬 수 없다! 계명으로 완정하다 인정받을 수 없다. 이는 사형 선고를 받는 것과 같다. 바울은 누구보다 엄격한 율법으로 교육 받고 자랐다. 그것은 그에게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비참한 절망과 정죄만 남겨놓았다.

 

루터(Luther)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믿음에 대한 눈을 뜨기 전에는 교리와 규정들이 그를 항상 짓누르며 생명에 대한 소망이 오히려 더 희박해졌다. 늘 한다고 하는데 사망의 상태 같았다. 바울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후에야’ 비로소 율법과 계명이 자신을 정죄하며 그 자체 안에는 죽음밖에 없음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이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3).”

 

하여 우린 통회하고 절규하며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2-24).”

 

이에 나는 오늘도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시 115:1).

 

나의 나 됨으로는 구제불능이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

 

이에,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