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민 30:2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7-8
우리는 늘 길 위에 서 있다. 어느 길로 갈 것인지를 매순간 선택하게 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대통령을 탄핵하는 선택을 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극단적인 어느 한쪽의 주장에 섰을 때 모든 사고 체계가 어떻게 왜곡되고 자기망상에 빠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두 번째 노래를 읊조리며 기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순례자들이라 생각한다. 곧 우린 여행 중이다. 길 위에 서 있다. 이에 오늘 시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때마다’ 지켜주심에 대해 묵상하게 한다. 누가 말하길 내게 참 복이 많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울컥하며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에 감사하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보다 주의 은혜로 사는 자는 없는 것 같다.
오늘 시편과 같이 ‘감사하는 노래’로 드려지는 시간들이 귀하다. 이때 오늘 시인과 같이 어떤 길 위에서 누구의 도움을 바라며 두리번거리게 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지를 지켜본다. 스스로의 자긍함과 애쓰고 수고함에 대하여는 열거할 수 있어도 자신의 잘못과 과오가 얼마나 엄중한지, 진정으로 인정하고 사과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인 듯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스스로는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겠다.
결국 우리가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만족과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앙으로 그 고백과 아울러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대한 찬양이 드려질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드높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철저하게 자신이 죄인인 것과 전적으로 용서하심과 주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편은 전반부에서 여러 도움의 근원을 찾다 비로소 우리의 도움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자문자답한다. 이를 인정하게 될 때에야 결국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심을 안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3).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데 있어 결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는 고백이 감격스럽다. 이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5-6).
하나님이 지키실 때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상하지 못하게 막으신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우심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움이 될 줄 알았던 ‘산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도우심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계셨다.
이때,
나의 도움이 어디서올꼬
(1).
하는 탄식,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눈을 돌릴 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그때에 눈에 들어오는 주의 도우심에 감격한다. 다시 누구의 말에서 느낀 것처럼 ‘나는 참 복이 많다’고 할 때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컥하였던 것도, 나 같은 죄인을 어찌 이처럼 사랑하시는가? 하는 데 따른 그 크신 은혜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심정으로 아멘, 하였다.
우리는 길 위에 서서 매순간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를 자녀들에게는 물론 뒤에 오는 이에게도 알려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곧 우리가 주의 뜻에 따라 사는 일이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이와 같이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경건하여 주 앞에 서는 일은 하나님이 진실하심을 알고 우리 자신도 진실하길 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
곧 우리의 가는 길이 뒤에 오는 이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경건한 삶이지 않을까? 이에,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 12:19).” 곧 우리의 진실한 입술은 주를 인정함으로 주 앞에 나의 허물과 실수를 고하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일이겠다. 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이는 자신을 부정하고 그 잘못을 주 앞에 고하여 용서하심을 받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곧 나의 삶이 단순히 나 하나 살고 마는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식과 내 곁의 모든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끼치며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된다. 이에 자신의 위치(?)를 바로 지키는 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딸의 서원을 부모가 혹은 남편이 허락하고 이를 지켜야 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의 서원과 결심한 서약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민 30:5).”
여기서 서원은 일반적으로 자기 소유 가운데 어떤 것을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겠다는 적극적인 약속이다. 그것이 시간으로든지 마음으로든지, 물질로든지 헌신으로든지, 이러한 서원의 한 예로 자신의 삶을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는 ‘나실인’의 서원이 있다. 그러므로 서원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로 약속하는 모든 것으로 이해한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맹세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하는 오늘 시편의 고백이 드려지고 난 뒤에 가능하다. 이를 인정하면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으로까지 가 닿는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면, 나의 나 된 것 그 무엇도 나에게 책임이 없다. 다만 이 모든 게 ‘천지를 지우신 여호와의 것’으로, 이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자유함이 있을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나의 잘못과 나의 죄를 아는데 나는 더 이상 나의 그와 같은 죄와 허물에서 속박당하지 않는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사방을 둘러보며 이 산, 저 산 기웃거리듯 살았던 날들을 생각하면, 그때가 참 미련하였다. 결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0-21).”
더는 그와 같이 죄에 종노릇하지 않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나의 그 어떤 죄라 할지라도 나의 도움이 되시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나의 보증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그러할 때,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근거로 주의 심판에도 나의 대언자가 계심으로 허물과 죄악투성이나 자유하다. 곧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오늘 이처럼 주 앞에 올라와 오후 내내 뉴스를 보며 다시 또 탄핵을 당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어느 가까운 훗날에 우리 모두 주 앞에 섰을 때 오늘의 이 혼란보다 더 끔찍하고 소란하고 두려운 시간 속에서도 감히 당당할 수 있는 진리의 영을 묵상할 수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다시는 죄에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것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다. 나의 도우심이시다. 나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키신다. 즉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돌보시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실진대 세상 그 무엇이 더 이상 두려울 게 있겠나? 그 하나님이 오늘 내 ‘우편에서 내 그늘’이 되어 주신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5).
그럼 더는 나를 위협하여 넘어뜨릴 것은 없다.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6).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늘 나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나를 해치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는 결국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1- 22).” 역설적이게도 나를 위협할 수 있는 것들이 나를 지키게 하신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6-7).
이를 알고 누리고 상고하고 묵상하며 살 수 있는 것으로 복이었다. 늘 어디가 아프거나 돈이 없어 힘들거나 어떤 일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어렵다, 싶을 때도 가만히 보면 그런 것들로도 나의 자유함은 든든하였다. 그래서 누가 나더러 복이 참 많다, 하는 말을 그리 하는 것에 나는 얼른 공감하며 눈물이 핑, 돌았던가보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6).”
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 가운데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15:1).
할 때에,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25:16).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121: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0) | 2024.12.16 |
---|---|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0) | 2024.12.15 |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0) | 2024.12.13 |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바칠지니라 (0) | 2024.12.12 |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0) | 2024.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