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민 32:1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시 123: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 그리고 므낫세의 반 지파가 요단 이편에 남기로 한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이며, 갓은 레아의 몸종 실바의 첫아들로 야곱의 일곱째이다. 이 두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더불어 같은 진기에 속한 지파였다. 저들은 결국 자신들의 소유, 심히 많은 가축의 떼로 인하여 목축에 적합한 이편으로 정착지를 정하였다.
이 가축들은 출애굽 당시 끌고나온 것과 대부분 정복 전쟁에서 탈취하여 얻은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의 부녀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가축과 양 떼와 재물을 다 탈취하고(31:9).” 야셀 땅과 길르앗 땅 이곳은 요단 강과 그 지류인 야르묵 강, 얍복 강, 아르논강 사이에 위치한 땅으로서 목축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질 좋은 소와 양들로 유명하다. 특히 시리아 지역에 농산물을 공급하는 곡창지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들이 ‘본즉 그곳은’ 하여 눈이 보고 마음이 흡족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다. 결국 민족적 사명과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는 사욕의 눈이었다. 당시 다른 지파들도 가축을 소유했었다. 그들도 자신들이 정복한 기름진 요단 동편, 이쪽 땅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시선을 돌림으로 사욕을 제어할 수 있었다.
오늘 말씀은 이를 가리켜 ‘가축에 적당한 곳’으로 표현한다. 야셀과 길르앗 지역이 가축을 사육하기에 적합한 생활용수와 목초가 넉넉한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결국 저들은 요단 동편에 거주하던 시혼과 바산, 그리고 미디안을 섬멸하고 그들의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가나안 정복의 발판을 구축했다. 그런데 이제 내부적 갈등으로 굳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필요가 없어졌다.
이를 망각하고 요단 동편에 안주하려는 극단의 이기주의자는 기나긴 광야 여정에서 지쳐 있는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미디안을 쳐서 얻은 땅을 그들의 분깃으로 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모세는 요단 동편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치욕의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반역’을 상기시키며 그로 인하여 저들 민족이 광야 40년의 여정을 돌아야 했던 사실을 설명한다.
그리고 만일 두 지파가 요구하는 그 땅에 머무르게 되면 각 지파의 분열로 인해 가나안 정복이 무산될 것을 우려하여 저들 요청을 거절한다(6-15). 그러나 이 두 지파는 타지파와 함께 가나안 정복 전쟁에는 참여할 것을 약속하면서 대신 뜻을 굽히지 않는다(16-19, 28-32). 결국 모세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공동 책임을 이행한 후에 그들 두 지파와 또한 이에 동조하는 므낫세 반 지파를 요단 동편에 거주하도록 허락하게 된다(20-27). 결국 본문 마무리에서 장차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차지하게 될 요단 동편의 구역을 열거하며 말씀이 정리된다(33-42).
일련의 사회 현상과 그에 따른 당리당략과 그 이해득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여당은 여당대로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고 야당은 야당대로 그들의 독주를 멈추지 않는 셈이다. 다들 나름의 명분과 그 사명이 있다고 하나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 공동체 안에서의 이기주의와 안일주의가 끔찍하게 여겨진다. 곧 성경의 역사와 되풀이 되는 사건사고의 현실 역사는 공존한다.
이때 우리에게는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결국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음으로가 아니면 이 모든 게 허사다. 곧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
사실 가까운 훗날 이스라엘 역사는 요단 동편에 거주하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우상숭배에 빠져드는 것은 자명하다.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대상 5:25).”그뿐인가? 결국 저들은 앗수르에 의해 지배당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26).”
불신과 이기주의와 탐욕에 따른 결국은 허무와 비극뿐임을, 앞서 아브라함과 롯의 사이에서 롯의 선택으로 증명된 바 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11).” 결국 우리 인생의 교훈은 돌고 돈다. 오늘의 상황도 보면 저들 나름의 논리와 당론으로 결정하는 일이 가까운 앞날에 어둠으로 비춰진다.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보이는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은 다 같이 힘을 합쳐 불과 만 이천 명으로 미디안 대군을 무찌르고,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스라엘 군대는 참으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31장).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 사이에 이처럼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용감하기로 이름난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땅으로의 ‘거룩한 행진’을 멈추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목초지가 있어 정복한 요단 동편에 안주하기로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리사욕에 당장은 명분을 찾고 이유와 자기 논리로 타당하다고 여기지만 그것으로 형제 지파들에게 끼칠 영향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자들은 절대 헌신할 생각이 없다.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7-38).”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실천한 자들의 것이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하필 40년 광야 여정을 다 같이 끝내고, 그것도 모세가 회고하는 슬픔처럼 38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결국 정탐꾼 열 명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하여 가나안 땅 정복을 포기하고 돌아가자 하여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으면서 40여 년을 돌았던 일인데, 이제 다시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직전에 점령한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의 훌륭한(?) 목초지와 곡창 지대에 혹하여 당장의 풍요로운 땅에 또 다시 무너지듯 안착하여 약속의 땅을 저버리게 된다니!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은 결국 눈에 보이는 대로 욕심에 이끌려 그 땅을 기업으로 줄 것과 자신들의 소유와 후손들은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많은 가축들이’ 있고, 그 가축들을 먹이기에 충분한 방초와 자연적인 풍요가 눈앞에 있었다. 그 땅을 요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욕심이다. 즉 그들은 욕심의 눈으로 그것을 본다. 실로 탐스럽고 아깝다.
오늘 어느 당이나 혹은 그들 입장에서 놓기 어려운 어떤 명분과 나름의 지지와 동조세력이 있겠다. 그것으로 저들은 계엄은 반헌법적이었지만 내란은 아니라는 이상한 논리를 세운다. 심지어 비상계엄마저 대통령으로서의 고유권한으로 고도의 정책이었다는 주장으로 포장한다. 어떤 이는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야당을 탓하고 저들을 반국가세력으로 적대시한다. 집단이기주의란 개인의 망상과 망상의 얼개다. 극우나 극좌니 하는 인사들의 언동은 그리하여 반인륜적이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척결의 대상이 된다.
오늘 이 르우벤과 갓 지파의 선택은 오랜 인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 시대마다의 파당적인 극단적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결국 욕심은 그렇게 잉태하여 죄를 낳고 멸망으로 이끌어 간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결국은 누구 탓을 하랴. 자기들끼리도 자중지란으로 대표를 축출하고 힘 있는 중진들이 당장은 득세하는 듯하다. 결국 르우벤과 갓 지파가 파국으로 치달은 것처럼 저들 또한 그 결과가 눈에 선하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하필 또 어느 목사나 장로나 왜 그처럼 보수라는 교회들이 나서서 극단적인 현실 참여로 비성경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마땅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면 안 된다. 신앙으로 영적인 눈을 뜨지 않으면 어렵다.
모세가 심한 책망으로 저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두 지파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대신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에는 참여하겠다고 약속한다.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 사건과 그 보고로 얻은 오욕의 역사적 사실을 저들은 새겨두지 않았다(13-14장). 누가 말하길 안 믿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설득하고 설명하여 돌이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은 설득이 아니라 선포로 이루어진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2-24).”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용서와 자비로 우리가 산다. 우리의 회심은 주의 은총으로 회개의 영이 이룩하신다. 우리는 그 어떤 타당한 근거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복음은 그런 것이고, 믿음이란 누구도 전하여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만 가능하다. 결코 우리의 수고와 노력, 이해와 상식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시야에서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존재함으로 우리의 삶은 온전히 주를 기쁘시게 한다. 이에 요단 동편에 남은 두 지파와 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는 이방의 침략을 받아 곤고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암 1:3, 13).”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저들 ‘눈에 보기 좋은대로’ 요청했던 요단 동편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 될 수 없었다. 실로 우리의 눈에는 일시적으로 좋아 보이고, 그것으로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나, 이 땅의 모든 게 다 유한한 것일 뿐이어서 정녕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 아니면, 끝내 인간의 땅은 멸망하고 그 위의 생은 참혹할 뿐이다. 모세는 이를 경고하였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민 32:15).”
그러나 저들은 이미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16-19).”
이미 그리 결정한 것으로 죄는 가중될 따름이다. 죄의 특성은 그 결과를 짐작하면서도 갈 데까지 간다! 어쩌겠나? 말씀은 선포하실 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여,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1).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3-4).
이와 같은 땅에서,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40:13).
기도하며,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8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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