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전봉석 2024. 12. 15. 21:08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고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민 31:7-8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 122:9

 

 

출애굽 제 40년,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머무르던 때, 가나안에 들어가 지켜야 할 각종 율례의 계시(27-30장)를 이르신 후의 일이다. 가나안 정복에 앞서 먼저 미디안을 괴멸시킨다. 앞전에 모압 왕 발락과 마찬가지로 위기의식을 느낀 미디안 족속들이 발락과 발람의 술책에 따라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바알브올의 음탕한 제의에 참석하게 유혹하였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이만사천 명이 죽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진멸하라 명하셨다.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25:17-18).” 이에 따라 오늘 본문은 그 명령이 실행되는 장면이다. 미디안의 다섯 왕을 처형하고, 복술가 발람도 죽였다.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31:8).”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미혹케 하여 영육 간에 죄를 범하게 한 이유로 미디안 족속을 진멸한 것이다. 악한 자에게 미혹되어 범죄 한 자보다, 범죄 하도록 미혹한 자들이 더 중한 벌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앞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은 이번 전투에서 그 어떤 손실도 당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공의를 실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 전쟁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25:1-18).

 

우리 삶에 있어 거룩한 전쟁은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 이를 방해하거나 죄로 오염시키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처단하신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 2차 인구 조사를 하였고(26장), 그때 군대를 조직하여 재정비하였다. 이후 가나안 땅에서 지켜질 각종 제사법과 규례들이 주어진 직후(27-30장)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스라엘을 범죄 하게 했던 미디안 족속을 멸하셨다.

 

이에 각 지파에서 천 명씩을 선발하여 도합 만 이천 명을 정예 군대로 조직하였다(31:4-6). 그들은 전쟁에 출전했던 미디안 뭇 남자들을 전멸시키고 다섯 왕들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모세는 이 전쟁에 신호나팔과 성소의 기구를 가진 제사장을 같이 파견했다. “모세가 각 지파에 천 명씩 싸움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그들과 함께 전쟁에 보내매(6).” 그 이유는 이 전쟁이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심판임을 알게 하신다.

 

결국 여호와의 크신 도움으로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든 백성에게 보이신다. 그러나 미디안 여자와 아이들을 살려두는 불순종을 저질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훗날 힘을 재규합한 미디안 족속에게 수많은 고초를 겪는 결과를 초래했다(삿 6-8장). 그만큼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우리의 사사로운 감정과 판단으로 수정, 보완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임무만 주어진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a).”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은 심판의 형태로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르시길, ‘원수 갚는 것이 오직 나의 할 바’라 하심으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이는 결국 우리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보복의 문제가 아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0-32).”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수 갚은 일을 금하시며 오히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또한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결국 이 일은 우리의 감정이나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21).”

 

하나님께 오늘의 이 모든 상황이나 나의 모든 ‘노여움’을 맡김으로,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곧 우리의 원수, 우리를 힘들 게 하는 모든 노여움의 실체가 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바라고 찾고 전적으로 주만 의지하게 한다. 오늘도 예배 전에 나는 일체 어떤 정치적인 입장이나 개인적인 지지의사를 서로 표현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예배 후 아니나 다를까 아무개가 일련의 사태에 대해 나의 생각은 어떠한가?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를 피했다.

 

이미 각자의 판단과 기준이 서 있는 데 대해 무슨 말을 어찌하든지… 결국은 자신의 판단이 생각을 주도적으로 이끌기 마련이어서, 다만 예수님의 자세를 본받아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는 관점에서 누가 나쁘고, 더 나쁘고 하는 논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나는 잘 안다. 결국 그렇다면 누가 덜 나쁜가를 가려야 하는데, 이 또한 부질없음은 이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 되신다. 왜 하나님이 오늘의 결과로 우리 앞에 화두를 던지시는지? 이를 자신의 문제로 가져다 생각하는 게 더 유익하였다.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우리의 궁극적인 원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모든 악한 세력이다. 우리 안에도 원수가 산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죄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 형벌과 고초를 당하시고 마침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럼 도대체 예수님이 어찌 그러한 일을 실행하셨나?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5-26).”

 

그리하여,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

 

다시 말해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때 우리들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알게 할 수 있는 증인으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이를 인정하게 될 때, 일련의 사태는 아주 위중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더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기를. 이에, 죄는 미워할지언정 더 이상 죄 된 인간은 미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승리에 도취한 군대 장관들이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진멸하지 않고 포로로 잡아온 일은 오판이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하고 지적하고도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31:15, 16).” 이에,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서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아는 여자도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둘 것이니라(17-18).”

 

결국 모세는 여자들 중에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알았거나(바알브올 음란 제사와 연관된 것으로), 임신의 가능성이 있는 여자들과 잡혀온 사내아이들을 죽이고, 성(性) 경험이 없는 여자들을 살려두어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거나 아내로 삼도록 했다(18). 이는 엄연한 오판이었다. 때로는 잔인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과 공의는 분명하게 실현 되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단호함이 결국 자신도 그 속한 공동체도 살린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외적 정결 의식을 통해 내적 성결을 요구하신다(레 8:5-13). 그러므로 혹시 이 일에 불성실한 자가 있다면 그는 선민의 대열에서 끊어지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어, 끝내 영과 육이 동시적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는 실로 거룩(정결)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의 기본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자만이 고백할 수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1, 4, 23, 26).

 

이를 바울은 함축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에 우리는 같이 기뻐할 수 있어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1).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를 두고 고백하기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