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민 33:55-56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8
때로는 말씀이 너무 잔인하다 싶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우리가 붙들 것은 우리의 이해나 상식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참 행복과 기쁨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가장 복되다.
한낱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그 생각을 사유함으로 즐거운 것 같으나 이 모든 게 부질없고 일시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안다. 우리의 참 행복은 자기만족이 아니었다. 이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것으로 우리의 존재 이유가 설명된다. 이 땅에 사는 목적이 분명해진다. 오늘 말씀은 이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모든 족속과 그들의 신상과 산당을 제거하라 하신다. 곧 오늘 우리의 사명도 다르지 않아서,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민 33:52-53).” 그러니까 하나님 아닌 것으로 만족함을 얻으려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55-56).”
이와 같은 말씀에 우리의 동의여부를 묻지 않는다. 인류애를 운운하고 이기적이네, 잔인하네, 하는 따위의 감상적인 생각도 필요하지 않다. 행여 그와 같은 감상에 젖어 이를 순종하지 않으면,
첫째,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될 것이라 한다. 가시가 하필 또 신체 중 가장 예민한 눈을 찌른다고 생각해보라. ‘그 땅’에서 축출시켜야 하는 것을 그리하지 못할 때 당하는 어려움으로 눈을 찌르는 가시 같다고 하신다. 이 예언은 가까운 훗날에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몇몇 원주민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그것으로 인해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에 그때 생존한 원주민들의 후예들로부터 심히 고통을 당했다.
더 큰 문제는 저들의 우상을 수용하여 따르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그 명령을 거역하면 그에 따른 뼈저린 고통이 따를 뿐이다.
둘째, 그렇듯 남은 자들이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된다. 이는 신체에 큰 상처를 입힐 흉기를 말한다. 그만큼 더 위협적이고 실제 엄청난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즉 가나안 원주민을 그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함으로 죄악 된 각종 문화가 그대로 스며들고, 저들의 우상이 어느 순간 이스라엘의 신앙을 잠식하였다. 결국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해야 하는 백성이 가증한 우상 숭배에 물들고 온갖 죄악에 물들어버렸다.
그렇게 되어 결국 저들에게 행하실 심판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다. 이는 매우 강력한 경고의 끝맺음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원주민을 전부 몰아내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들이 당할 엄벌을 저들이 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죄악으로 심판받아 마땅한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파멸과 축출을 계획하셨는데 이를 이스라엘이 거역하여 생긴 결과이다. 이는 앞서 저들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6-17).”
이에 오늘 말씀은 후에 여호수아를 통해 또 한 번 전달되었다.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3).”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이와 같은 경고를 무시함으로 훗날에 기어이 그 쓰라린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곧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아서 말씀을 가벼이 여길 때 결국은 살면서 삶으로 그 삶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요단 동편에서 이제 가나안 정복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내분으로 비화될 뻔했던, 요단 동편 지역을 요구한 르우벤과 갓 지파 문제까지 해결한 후 가나안 정복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와 같은 상황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으로서 저들이 언제, 어떻게 애굽을 출발하여 40년 후 이 요단강 연접한 모압 평지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각각 저들이 머물렀던 숙영지를 중심하여 기록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40년간의 여행 중에 진을 쳤던 마흔 한 곳의 숙영지가 열거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시내 광야까지의 여정(3-15), 시내 광야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여정(16-36)이 순차적으로 열거된다.
마지막으로 오늘 맨 끝 부분에서 가나안을 정복할 때 그곳 주민들을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다(50-56). 실제 애굽에서 최종 숙영지인 모압 평지까지의 거리는 일반 여행자의 걸음으로 약 1주일 남짓 걸리는 매우 가까운 거리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40년이나 허비한 후 비로소 그 여정을 마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이 빚어낸 뼈아픈 결과이다(14장).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온전하지 못할 때 그 마음이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한 가운데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그냥 입성시키실 수는 없었다. 이는 문득 내가 주 앞으로 돌아오기까지 곧 오늘의 목회를 감당하기까지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서도 40년이 넘는 시간을 돌리셨다. 앞서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으며 같은 또래들과 서원하며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한 뒤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불순종의 길을 자처하였다. 나름은 문학을 사랑하고, 세상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동안 교회도 다니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더 사랑하거나 동시에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와 어떤 관계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지를 알게 하시려고 그 긴 시간을 돌리시며 여러 곳을 숙영지로 삼아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하게 하셨다. 오늘 기록된 마흔한 곳의 처소명은 단순히 머물렀던 그곳의 이름이 아니라, 그 긴 시간 동안에 우리의 영욕(榮辱)의 역사이다. 영예와 치욕이 동시에 내포된 고난과 갈등, 눈물과 절망의 지명이면서 그만큼씩 지속적으로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증거이다.
나 역시 가만히 내가 좋아하고 따랐던 사람들이나 어떤 문화나 그 부류 속에서의 흔적들이 떠오른다. 스스로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매일같이 광야를 뚫고 세찬 모래와 바람과 싸워야 했던 시간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나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으로까지 인도하였다. 더는 세상을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구력(舊曆)이 생기게도 하였다. 하여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로 하여금 내가 주의 것이라는 데서 안도하고 감사하며 평안을 얻게 한다. 결국 나의 ‘애굽에서 모압 평지까지’의 여정은 고단하였고 더러는 환멸과 오욕의 시간들로 어느 순간을 생각할 때 지금도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주께로 숨게 한다. 그러는 동안 나의 마흔한 곳의 숙영지는 상징적이다. 나의 라암셋을 출발하여 시내광야를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나는 세상을 부러워하였고 내가 사귀는 사람들을 따랐으며 저들이 사랑하는 것을 얻으려고 비루하였다.
기나긴 여정에서 휴식처로 여겼던 곳들이 온통 오욕의 흔적이며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남아, 오늘에 이르러 주의 은혜를 생각할 때면 넘치는 은혜에 면구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이에 그때마다 또한 내 곁을 지키며 나로 돌이켜 주 앞으로 인도하였던 믿음의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내가 아는 소경 장로님들과 그때마다 아무 상관도 없는 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기도로 후원하고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 스쳐가기도 한다. 저들을 보며 나는 내가 저 본향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인 것을 배웠던 것 같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하여 이제는,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2).”
고로 나의 사모함이 주를 바라는 것이 되어 감사하다. 불평과 원망 그리고 나의 노여움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내 안의 이런저런 응어리나 어떤 무게의 슬픔과 걱정이 더는 나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셨다. 하여 나에게도 ‘마흔한 곳의 처소’가 있었으나 그것은 이제 단지 치욕스러운 과거일 뿐, 나의 불순종의 흉터 같아서 주 앞에 늘 아뢰어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기를 기도한다. 더하여 내 곁의 더러 그곳에 머무는 이들을 주의 이름으로 긍휼히 여기며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심을 안다.
이제 나의 남은 삶은 ‘가나안을 정복함’으로 나의 기질적인 우상과 가증스런 죄악의 뿌리를 제거하며 주 앞에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더는 물질에 구속되지 않고, 사람의 인정에 억매이지 않으며, 문화의 시류에 흘러가지 않고, ‘내게 허락하신 땅’을 차지하여야 한다. 이에 나는 주의 말씀으로 순응하며 온유하여,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하심과 같이,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시 124:1-5).
그러므로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6-7).
이는 결국,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0) | 2024.12.19 |
---|---|
평강이 있을지어다 (0) | 2024.12.18 |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0) | 2024.12.16 |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0) | 2024.12.15 |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0) | 2024.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