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민 35:34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가나안 사방 경계와 그 땅을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분배하신다. 아직 정복하기 전의 일이다. 그와 같은 명령에 이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이 없이 성막 봉사에 부름 받은 성직 지파 레위인들을 위한 성읍을 지정하고, 더불어 억울한 죽음을 면할 수 있는 도피성 제도를 정하신다.
먼저 레위인이 받게 될 성읍은 모두 마흔여덟 곳이다(1-8). 그 성읍들 가운데, 고의적으로 살인을 한 게 아닌 자를 위하여 여섯 개의 도피성을 두신다(9-15). 살인자와 과실치사자에 대한 각각의 취급 방법을 정하신다(16-25). 이에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에 대한 규례를 소개한다(26-34).
레위인의 성읍에 관한 규례가 특별히 언급된 것은 그들이 거룩한 일에 전념해야 할 자들로 별도의 영토가 분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18:20, 23).”
그 대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그들에게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거주지와 십일조 등을 관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땅만은 필요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특별히 본장을 통해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로부터 약간의 거주지를 제공받게 하셨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마흔여덟 개의 성읍을 제공하시고, 그 가운데 여섯 개를 도피성으로 지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들의 도피처로 선정함으로 그들의 터전은 철저히 종교적이며 공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즉 레위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전역에 골고루 배치되어 일반 백성들의 신앙과 각 사회생활을 이끌어가게 하셨다. 그런 가운데 비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자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시고 무의미한 살인의 악순환을 방지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는 생명을 보존하는 기관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영적인 기능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사명으로 부르심을 받아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의 사명을 상기시켜 준다. 오늘 우리는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세상에서 올바른 생활과 경건한 문화를 창출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참 생명 되신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를 말하면 대부분 목사나 어떤 특별한 직분자들로 한정하여 자신들을 예외로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서도 지극히 수동적일 뿐 자신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인 것을 극구 외면하려 한다.
어제는 그러다 성경이 다소 억지로 그 역사를 지어낸 듯하다는 소릴 들었다. 가령 욥의 경우 열 자녀를 동시에 잃고 모든 가산과 가신을 잃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 그 믿음이 증명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열 자녀를 받고 가산을 두 배로 받는 내용에 대하여 이를 축복이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즉 자식을 열 잃고 다시 열을 얻었다고 해서 이를 과연 축복이라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깨닫는 데 있어 하나님의 관점과 전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가 아니면 새삼 이를 깨달을 수 없다는 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가 이 땅에 많은 자녀를 낳고 다복하게 살다 평안히 죽는 것을 복이라 하지 않으신다. 그런 가운데 열 자녀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다시 또 열 자녀를 주셨다는 것을 설명하는데서, 듣는 저로서는 마지못해 수긍하는 듯 마땅찮은 듯 들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성경은 우리에게 사명감으로 이를 듣게 하려 하신다. 곧 우리는 자신이 이 시대의 레위인으로 사명을 가졌다는 사실에 부담을 갖는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곧 우리 죄를 위하여 주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의 사명이 그 자체로 얼마나 귀하고 복된지를 알 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출 23:25).” 이에 따른 오늘 우리 삶의 현실적인 문제는 물론 영적인 문제에까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새삼 느끼는 것은 성경을 설명하여 설득시키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선포하고 그에 따른 성경을 증거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곧 각각의 선택과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서로의 의지나 그에 따른 나름의 이해와 논리로 설득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우린 다만 전하고 이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더는 관여할 관여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당시 여호수아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하고 선포한 후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15).”
곧 선택과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우리는 나누고 인정할 뿐이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9-10).” 오직 주를 의뢰함으로 나는 나의 빈손으로 주의 일을 행할 뿐이다. 이에 또한,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11-12).”
이것으로 나의 일이겠고,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3).” 그 외의 것으로는 전적인 저의 선택이겠다. 그러므로 내가 억지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14).”
하여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나는 성경을 전하고 선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성경은 레위인들로 하여금 저들이 받을 마흔여덟 개의 성읍 가운데 여섯 곳의 도피성에 대하여 언급하시며 이를 관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요단 동편 땅을 12지파에게 골고루 나누고, 이에 봉사자들로 레위인들을 세워 저들이 거처할 성읍을 주시며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도피성을 두심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허물을 싫어하시지만 그것으로 영영히 멸망당하는 것을 더 싫어하신다. 이를 성경은 여러 곳에서 언급하는데,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4).
하고 시편은 찬송하고,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하고 지혜자는 의인은 기어이 다시 일어나는, 일으키시는 것에 대해 진술하고 있으며,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하박국 선지자는 이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에게 임할 진노를 돌려 수년 내에 부흥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이에 더욱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확신한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b).”
하여 고난의 대명사라 할 욥은 회개를 하여,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1-6).”
이와 같은 놀라운 사명은 더러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이해와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지만 분명히 그런 가운데서도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므로 우리는 한 생명을 얻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이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4-15).”
이에 오늘도 주를 찬송하며,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 126:2).
이는 이제 나의 죄를 회개하고 주 앞에 섰을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3).
참으로 기쁨을 알 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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