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들의 숙부의 아들들의 아내가 되니라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
민 36:11-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므낫세 지파의 반쪽이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 터전을 잡았고, 저들 나머지 반 지파가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와 기업을 받았다. 이에 더하여 슬로브핫 딸들의 상속이 저들 지파와의 결혼으로 할당된 땅이 확장하여 넓혀졌다. 비록 아들이 없어 딸들이 기업을 상속받고, 그 지파 내에서 결혼함으로 각 지파의 땅을 각 지파 내에 영원히 남게 한 본문의 규례는 합당하였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백성들의 기업 바로 그 땅을 타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영영히 보존되게 하신 사실은 그 의미가 크다. 오늘도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원한 생명을 기업으로 받은 땅을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보호하심으로 능력 가운데 결코 쇠하거나 빼앗기지 않는다. 우리의 이 영원한 소유가 분명함을 새삼 다시 확신하게 된다.
오늘 므낫세 지파의 장로들은 이 문제를 제기함으로 슬로브핫 딸들이 타 지파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 그 딸들의 분깃이 타 지파에게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물었다. 이를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은 여자는 반드시 아버지가 속한 지파 내에서만 결혼하여야 한다고 규례를 마련하셨다. 그래야 지파간의 갈등의 소지를 제거할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상속법의 보완 작업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유한성을 발견하게 된다. 곧 율법이 지니는 점진성과 예표 하는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곧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이에 오늘 므낫세 장로들과 모세를 통해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하여 슬로브핫 딸들의 순종도 눈여겨 보게 된다(10-12). 곧 각 지파의 고유한 영토를 보존하는 데 있어 보완된 상속법으로 딸이 상속받은 것은 같은 지파 내에서 결혼하는 것으로 그 질서는 유지되게 되었다.
이에,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6).” 하시는 말씀을 따라,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10).” 순종이 그렇듯 아름다운 일이어서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12).” 이는 순종의 상태에서만 가장 아름답고 축복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삼상 15:22-23).”
그렇듯 슬로브핫 딸들의 결혼은 가나안 땅에서 아버지 슬로브핫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기업이 주어진 것을 기뻐한 슬로브핫의 딸들이 하나같이 자기 지파 내에서 결혼할 수 있다는 ‘제한적인 규례’에도 순종하였기 때문에 순탄하였다. 사실 혼인 문제는 개인의 자유의사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타인의 강압이나 규제는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결혼의 창시자는 또한 하나님이심으로 주가 제한하시고 간섭하시는 경우 자신의 의지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사실 이 문제는 믿음이 있어도 순종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나, 사랑은 엄연히 감정의 의미가 아니라 의무와 사명의 문제로 그 책임을 다하는 의지의 문제다. 흔히 좋아한다는 감정은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인데, 요즘은 흔히 좋아한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동일시하면서 사랑은 의지의 문제가 아닌 감정의 하나로 전락하였다. 의지적으로의 사랑은 더러 감정이 식는다 해도 결단과 책임의 문제로 따라야 한다.
실로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과 행복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의 의미에까지 확장한다. 나아가 종교적으로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결혼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전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막중한 사명이기도 하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신 말씀으로 토대로 하면 모든 게 다 여기에 속하는 일이지만, 결국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슬로브핫 딸들의 결혼에 따라 그 순종은 결국 하나님의 질서를 위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자유를 절제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결정이 되었다. 그러한 결혼이야말로 실로 우리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여리고 맞은편 요단가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이라는 긴 여정을 기술한 민수기의 결론으로, 이 모든 말씀을 여호와께로부터 모세가 직접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결코 개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신적인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임을 또한 깨닫게 한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그 개개인의 것이 서로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에는 결국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에 모든 이야기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인정하게 된다. 오늘 아이와 성경공부를 할 때 아이가 로마서 13장 1절 말씀을 들어 오늘 우리가 처한 사회현상에 적용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문맥적으로는 일련의 사태에서 그럼에도 불법적인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내란죄에 대해 우리의 단죄가 옳은 것인지, 또는 상대 진영의 인사나 그 대표 혹은 저들 권세 잡은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어쩌면 이 문제는 우리 성도들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국가관과 사회규범을 어떻게 정리해야 옳은가 하는 문제였다.
우선은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하고, 이 편지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여지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음 이 한두 구절의 내용으로 속단하여 마치 대통령이나 통치자들 하면, 하나님이 내리신 종으로 여겨 삼가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통치행위에 복종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그러나 이를 간단하게는 13장 전체 내용으로 놓고 1-7절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자들에게 맡기심을 인정하되, 8-10절에서 우리 성도들의 기본적인 신앙 윤리를 전달하고, 끝으로 결론이랄 수 있는 11-14절에서 결국은 이러한 것에 연연하기보다 우리가 우선해야 하는 것, ‘자가가 땔 때’에 대하여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곧 재림신앙을 강조하고자 하는 바, 당시 로마의 압제와 저들 그 악한 왕권과 폭압의 정치에도 그들을 인정하라 하는 것은 그러한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저들의 악함과 악한 날을 위하여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를 앞의 서두부분만 강조하여 소위 극우 인사들의 주장은 성경적으로 오류가 있다. 혹은 악의적으로 자신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또 따른 권세에 따른 탐욕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교회 밖에서의 우리 성도의 생활은 사랑으로 증명된다. 즉 그리스도인과 사화와의 관계는 거시적으로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신 데서 실제 우리의 실천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이에 성도의 사회생활은 저마다의 이념과 진영논리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이를 총망라하여 균형 있는 자세로 성경 중심의 자세가 필수적이다.
또한 우리의 국가와 사회관은 이 땅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국가관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규합된다. 곧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오늘 이 사회의 윤리나 도덕, 가치관이나 사상이 너무 어둡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한 마디로 같이 일희일비하여 휩쓸려 다닐 문제가 아니다. 우리로서는 이때를 보며 주의 날이 가까움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다소 소극적으로 그의 국가관을 말함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종말론적 신앙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다시 로마의 황제나 권세 잡은 자들이 옳고 선하여 저들의 권세에 복종하라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저들은 결국 저들이 맡은 악한 사명을 다할 뿐이다. 출애굽 직전까지 바로가 바로로 그 완악함이 더욱 견고하였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로, 저를 일컬어서도 ‘나의 종’이라 하셨다.
설마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 제국의 정치에 영합하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정말 성경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사회적 위치는 피지배자이다. 성별이나 인종이나 신분의 차별을 받으나 이를 개의치 않고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정치와 사회 제도 등에 대하여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열등한 신분이거나 그런 상태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가치가 이 땅의 권세나 또는 사회적 제도, 그에 따른 기여도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국가 권력에 순응해야 한다는 바울의 교훈을 오히려 권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확대 재생산하여 마치 불의하고 악의적인 권력 앞에서도 순종하거나 부화뇌동하여 자신들의 권력도 유지하려는, 악의적인 저의를 차단하게 한다. 오늘 날에도 그와 같이 정치판에 뛰어 들어 목청껏 어느 쪽을 지지하며 권세 앞에 굴종하는 저들은 자신들이 현재 기독교 내의 권력과 사회적인 권력을 유지하려는 속셈이다.
이에 바울은 13장 결말부에서 우리의 종말론적인 신앙을 중심에 두어 실은 이를 나타내고 하여 소극적인 국가관을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고히 믿는 종말론적 신앙을 유지하고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재림의 날을 대망하며’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의 윤리와 종말론은 이 땅에서의 국가관보다 앞선다. 하여 우리는 오늘도 이 땅에서의 유익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임박한 종말 의식으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이에,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12-13).”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정치적 독립을 얻기에 갈망하였으나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기독교 내에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자유’의 개념을 바로 깨닫게 하여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하신 참 자유를 늘 상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 권력에 대하여,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곧 저들 권세 잡은 자들의 첫째 의무는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으로 합법적이고 공정과 상식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
이에 성경 어디에도 폭군정치와 폭압정치를 옹호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합당할 때 순종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그렇지 못한 당대의 현실정치에 의해 결국 사도들은 모두 순교 당했던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사회 참여를 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악의에 굴종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공의에 두려워해야 한다. 이를 우리 양심이 알린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롬 13:5).”
이상과 같이 아이와의 성경공부와 오늘 묵상의 내용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곧 우리 성도의 윤리는 하나님 사랑으로 그 의무는 당위에 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이웃을 사랑함으로 증명한다. 재림신앙이 그 바탕이 된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이 모든 일의 결국은 주가 이루시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아무리 용쓴다 해도 하나님의 공의만이 세상을 바로하고 온전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평안이 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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