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4. 12. 21. 21:36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신 1:31-3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28:1

 

 

같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는데, 모세는 답답한 마음으로 고한다. 자신의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안은 것 같이’ 자신을 인도하셨는데 어찌 이를 백성들은 알지 못할까? 하는 탄식이 섞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고 성토한다. 같은 생을 살며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느끼는 그 하나님이 다른 것은 이와 같은 차이가 있다. 어찌 그러한가하고 살펴보면 서로의 간절함에는 그 농도가 다른 것 같다.

 

모세의 경우 그 막중한 사명과 두려운 마음으로의 책임감이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일차적으로 애굽에서 실패하여 도망자로 광야에 숨어들었다. 그렇게 40년을 미디안 광야를 떠돌았고 그렇다면 누구보다 광야에 대한 지리와 경험은 다른 백성들보다 월등히 나았을 테지만, 주의 부르심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 저들을 인도하여 내기까지, 저는 주저하였고 머뭇거렸으며 수없이 많은 갈등과 회의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그때마다 서로 다른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참고 견디기도 하였고 그런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여야 했다. 그러니 그 속이 얼마나 애끓는 심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되뇌며 자기와의 싸움에서부터 백성들을 치리하고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누구보다 심한 고뇌와 갈등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때마자 저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주를 신뢰하고 다시 또 주께 의지하는 길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이에 오늘에 이르러 저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자신을 보호하신 하나님으로 회상하며 백성들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주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상하고 한없는 사랑을 생동감 있게 나타낸다. 곧 이와 같은 감동과 감사는 온전히 주를 신뢰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자의 것으로,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3-4).”

 

하시는 주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듣고 이를 보고 느끼며 사는 삶은 복되다. 가령 누구보다 몸이 약해 늘 돌보고 건사하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데도 언제 또 어떻게 어떤 고통이 몸을 지배할지 알 수 없어, 늘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루 중 매순간이 주의 이름을 되뇌는 삶이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토요일 오후, 아흔 살 장모를 혼자 돌보며 집에 있어야 하는데 나는 조그만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장모의 방을 들여다본다. 행여 물을 마시다가 사래라도 걸려 연거푸 기침을 할 때면 가슴이 오그라든다. 고질적인 불안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혼자 있을 때도 여럿이 있을 때도 그때마다 뭐가 그렇게 어렵기만 하다.

 

다음 달부터 두 아이가 같이 올 것 같은데 갑작스런 강박적 난독을 호소하는 아이를 어떻게 대하며 글쓰기를 해야 할지, 나는 앞서서 염려가 먼저 요동을 친다. 다음 주에 누가 온다고 하면 벌써부터 마음은 저 혼자 수선스러워 머릿속으로는 벌써 여러 가닥의 계획이 중구난방으로 설쳐댄다. 그러니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도 늘 안정제를 달고 사는 터라, 누구의 어떤 사연을 들을 때면 두 곱으로 감정이 이입되어 슬프거나 마음이 쓰여 고달프기도 하다. 몸이 어디 아프거나 힘든 거야 참는다고 참으면 될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므로 나는 늘 주님, 하고 들숨날숨을 내뱉거나 들이쉴 때면 간절함으로 몸서리친다.

 

모세 뿐 아니라 주의 사람들의 심정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2-4).”

 

이를 알고 이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표현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는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그러니 실로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어찌할까? 결국은 저마다 받은 은총으로, 건강함으로 안이하고, 물질적으로 적당함으로 태평하며, 가진 것이 많아 그것을 내려놓기 어려워서 하나님과의 거리도 적당히 여기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그러니 모두가 기어이 고통과 남다른 역경으로나 주의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가장 헌신적이라고 여기는 부모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기어이 이 일을 ‘믿지 아니하였도다.’ 하는 모세의 탄식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돌아보면 나의 젊은 날 내 곁의 누구는 나의 나태한 믿음과 위선적인 신앙에 탄식하며 힘겨운 위로와 충고를 하셨던 이들이 여럿 있다. 그땐 그 말이 어쩜 그리도 듣기 싫었던지…. 아버지는 당시 본인의 설교를 녹음하여 그 테이프를 내게 주며 운전하면서 들으라고 주기도 하였는데, 그땐 그게 그렇게 싫어서 어디 낚시터에서 죽은 고기와 함께 버리고 온 기억도 있다.

 

그러니 나는 오늘 모세의 탄식 섞인 설교가 가슴 저민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와 광야 여정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매 사건마다 풍성히 나타났음을 저들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애굽 위에 내린 열 가지 재앙도, 홍해를 걸어서 도하하는 역사에서도, 뜨거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추운 밤에는 불기둥으로 광야를 앞서 걸으시며 인도하셨던 것과 그때마다 음식과 생수를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이 ‘아들은 품에 안은 아버지’ 같았음을 모세하는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12).”

 

살면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나야말로 오늘에 이르러는 주의 사랑과 은총으로 이를 체험하고 목도하여 누구에게라도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여서 때로는 분에 넘친다. 요즘은 산책을 할 때 지팡이를 짚고 가는데 그렇듯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딛고 걷는 걸음걸음이 감사할 때가 있다. 오늘도 이만하면 감사하다, 하고 이처럼 앉아 묵상글쓰기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은혜 안의 일이었으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아직은 나이가 있어 괜찮다고 하나 어느새 벌써 이 나이가 되어있는 나 자신으로 인해 놀라기도 한다. 거기에 겉늙어서 그런가? 심심찮게 여느 길에서 누가 내게 어르신, 하고 부를 때는 민망하면서도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다들 백세시대를 운운하며 설마, 하고 자신의 남은 날을 계수하지만 언제든지 오라, 하시면 감사히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날들을 살고 있는지? 그러하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무슨 일에서고, 어떤 상황을 두고서도 주의 선하심을 인정할 수 있으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오늘이 나의 남은 날의 전부다 하고 생각하면, 세상이 어지럽고 악하다고 여길수록 나의 때를 아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6-7).” 에베소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은 오늘 내게 전하여진다.

 

누구의 헛된 말에 속지 않기 위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다소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 더러는 연락을 피한다. 심지어 누구의 전화번호는 차단을 시켜놓기까지 했다. 언제부턴가 안 믿는 자보다 믿는다고 하면서 ‘나 홀로 신앙’을 주장하는 믿는 자들의 궤변이 더 괴롭다.

 

저들도 교회를 다니거나 다녔던 자들이라, 또는 가족이나 가까운 누가 목사여서 행여 나의 말 가운데 어떤 부분을 성경으로 말하려 하면 경멸하는 듯한 반응을 보여 다음 말이 어려워진다. 심지어 가까운 누구는 나더러 예외라면서 조금은 ‘트인 목사’가 될 줄 알았는데 ‘꽉 막힌 목사’가 되었다며 아주 못 봐주겠다는 듯 한심스러워하였다. 진짜 요즘은 이상한 게 교회를 안 다니면서도 자신은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듣다보면 내가 아는 하나님은 아닌 듯한데 뭐라 한들 들을 리도 없고 해서 나로서는 거리를 두고 피하기는 하는데….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8-19).”

 

그런 거 보면 아직 저기, ‘요단 저편’에서 멈춰 있거나 도무지 약속의 땅으로 들어올 마음이 없는 것 같은 이들도 수두룩하다. 르우벤과 갓과 베냐민 반 지파와 같이 자신들의 생활 기반은 저쪽에 두고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일에는 참여하겠다고 하는 이들 또한 적잖은 듯하고. 여기서 ‘저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베르’로 모세의 현 위치에서 볼 때 이 말은 ‘요단 강 이편’으로 어찌 됐든지 아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거기, 홍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얌 숩’에서 오늘 모세는 고별 설교를 한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신 1:1).”

 

말씀에 대한 지식은 순종할 때만 의미가 있다. 순종이 없는 말씀은 그저 들리는 소리이다. 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이에,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나의 한 날을 돌아보고,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두고 마음을 쓰다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 하시는 데서 멈추어 서서 묵상과 기도로 주 앞에 간절하다. 그럴 때 인생의 바른 방향을 잡고,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고 산다. 나는 할 수 없어도,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5-6).

 

하시는 데서 멈추어서 나의 연약함과 부끄러움과 부족함과 더러는 인내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호소하며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나의 하나님은 그때마다 나를 안으시는 아버지처럼 품에 안고 보호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게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8-19).” 이는 곧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여 오늘도 앞서 간 성경의 인물들부터 내 곁의 믿음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3-14).”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1).

 

이처럼 내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