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신 2:14-15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1-2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 광야를 돌았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130킬로미터 정도여서 보통 장정들의 걸음으로 1주일 정도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년 동안을 헤맨 것은 저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탐하고 불신앙적으로 거부하면서 하나님은 그에 따라 도합 40년의 시간을 광야에서 떠돌게 하셨다. 명백히 징벌 때문이다.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신 1:2).”
또한 ‘그 시대의 군인들’이라 하면 출애굽 제 2년 2월 1일에 시내 광야에서 행한 1차 인구 조사에서 20세 이상 된 자로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인원으로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민 1:3).” 그런데 이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광야 생활 38년 동안 유리하며 모두 죽었다(민 14:26-35).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 때문이다. 비록 이들이 아말렉과의 르비딤 전투(출 17:8-16) 등 전쟁 경험을 터득한 세대라 할지라도 지휘관의 명령을 거역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미련 없이 버리시고 전혀 전투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가나안 정복 사업을 맡기셨다. 출애굽 사건과 그때의 열 가지 재앙을 친히 목도하고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을 저들은 결국 깨닫지 못하였고, 그와 같은 의심으로 불순종하였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분명히 말씀은 선포되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출애굽 세대는 여호와의 군대로 편승하였으나 자격을 상실하였고, 가나안을 정복하는 영광도 얻지 못하였다. 여기서 출애굽과 가나안의 의미는 새롭다. 출애굽을 구원으로, 가나안을 천국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포괄적으로는 그러하겠으나 실제 우리 일생에서의 신앙의 경로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즐기던 세상으로부터 해방하여 회심 후 출애굽은 이루어지고 이에 따른 ‘가나안 진격’ 곧 믿음으로의 성화로 우리가 ‘침노하는 천국’으로 이는 확장한다.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심은 곧 그런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는 기간이 저마다의 순종에 따라 다른 것으로 누구로서는 기어이 40년의 광야를 떠돌다가 비로소 가지고 있는 기력(능력)을 다 소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부끄러운 구원도 있는 셈이어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하는 말씀으로도 비추어 보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
결국 우리의 천국은 모두가 일률적이고 공평한 분배가 적용되는 게 아니다. 각자 그 누릴 수 있는 영광이 서로 달라서 각각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하는 말씀으로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마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바 된 자로 천국 백성이 분명하다 해도 저가 받을 상급은 개별적이라 할 수 있다. 하여,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이를 알았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그토록….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이 놀라운 비밀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항상 ‘영적싸움’에 대비한다. 즉 우리에게 정복하라 하시는 가나안은 그처럼 녹록하지 않다. 처음의 어떤 계기로 그 은혜가 뜨거웠거나 좋아서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을지는 모르나 그 신앙과 믿음을 지켜가는 데 있어서는, 이게 결코 우리가 섣불리 상대할 수 있는 그런 싸움이 아닌 것이다. 하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하면 우리의 일은 전적으로 주를 의뢰하고 주 앞에 나의 전적인 의지와 신뢰로 주만 바라야 한다. 이에 우리는 더러 두려움과 근심으로 낙심하거나 실망할 때도 있겠으나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 즉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결심으로 당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어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이는 오늘 날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아 이 작은 나라 안에서도 서로의 판단과 기준이 다르고, 각각의 진영논리와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서로에 대한 반목과 갈등은 같은 민족끼리 더 골이 깊어 잔인하여진다. 그렇다면 우린 어느 쪽으로 어떻게 서야 옳을까?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먼저는 무장해야 한다. 타성에 젖어 게으르지 않게 서서, 진리로 띠 띠고, 의로 흉패를 삼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들어야 한다. 오늘도 이처럼 말씀으로 굳건히 서는 것도 그 때문이어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18).”
말씀과 기도는 하나라. 우리의 묵상은 흔히 말하여 명상으로 오해하고 자신을 비운다고 하는데 그 반대의 개념으로 말씀으로 자신을 채워 그 말씀을 바탕으로 주께 아뢰어 회개와 중보가 일정하다. 자신의 필요를 구하다 주 앞에 회개에 이르고, 회개를 하다 누구를 위한 중보가 따르게 돼 있다. 결국 우리의 가장 허무한 삶은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이다. 오늘 1절에서도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우리가 방향을 돌려’ 결국 가데스에서 회정하여 홍해 길로 다시 광야로 들어간 것이어서, 지난날의 생을 돌아볼 때 후회와 허무한 날들이 너무 아쉬워서 탄식이 절로 나온다.
성경은 일러,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5-17).”
이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나름 우리가 애써 수고한다고 하는데 그 수고가 허무하여서 각기 제 갈 길로 가기 일쑤인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결국 우리에게 길은 하나뿐이어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이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더러 물러설 자리가 없는 곳으로 가 선다. 그때마다 죄는 치명적으로 대가를 요구하는데, ‘죄의 삯은 사망’이란 원리에 따라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스 9:7).” 이는 곧,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시 37:38-39).
고로 우리는 저들과 한데 섞일 수 없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이는 참 현실적으로 어려운 말씀이라,
어찌 믿지 않는 자와 그리 선을 긋고, 어찌 의와 불법을, 빛과 어둠을 구분하여 나눌 수 있겠나?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할 수 없는 것도 잘 알지만 사람들의 마음이란 그런 게 아니어서 저마다의 우상으로 십자가를 심지어는 성경을 무슨 영험한 심벌로 두어 거길 한복판에 붙이거나 곁에 두어 액운을 막아주듯 사용하기도 하는 경우들도 있다. 지나치게 어떤 절기나 의식을 앞세워 그 의미보다 그 자체에 다소 광적인 열심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바울은 이를 알고부터 일체의 감사, 자족함을 배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결국 이 일은 우리의 결단이나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고로 오늘도 내가 이처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누구의 일에 거절하지 않고, 나의 어려움으로 기꺼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이는 결국 오늘 나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비록 내 코가 석 자라 내 앞가림도 어렵다 해도,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그래서도 나는 ‘그냥, 한다.’ 남들이 보기 우습고 한심한 지경이라 해도 묵묵히 그저 이 또한 주가 내게 맡기신 나의 사명인 것을 인정하면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행할 뿐이다. 그러할 때에 오늘의 어떤 어려움이 또는 고통이 결코 좋을 리 없으나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1-13).”
그렇게 나는 나의 어려움으로 주를 사랑하는 일이어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35:27).
그러할 때에 나를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나는 오히려 일체의 자족함을 배워가는 것일 테니,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129:2).
그것이 더러는 육신의 약함이고 더러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였으며 더러는 나의 자격지심과 열등감이기도 하여서,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3-4).
돌아보면 그게 더욱 나로 주 앞에 간절하게 하였다. 오늘 나의 어려움으로 나는 주 앞에 나아오고 말씀 앞에 나를 앉히며,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올린다. 그러할 때에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5,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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