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신 5:32-33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시 132:7
‘삼가 행하여’ 하는 부분에서 요즘이야말로 ‘삼가 행하여’ 어느 쪽으로 기울은 판단과 기준을 자제해야 할 때라 생각한다. 이를 그 어원으로 뜻을 살피면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치다’라는 뜻이다. 곧 나의 마음이나 생각에 아무나 휘젓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일이다. 이는 ‘신중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이고, ‘조심스럽게 처신하다’ 하는 의미로 나아간다.
성탄절인데도 불구하고 세계정세는 급변하고 있고, 국내 상황 역시 서로가 그 의견이 갈리어 이쪽과 저쪽의 이견이 좁혀질 것 같지 않다. 이에 우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시는 데에 주목할 것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삶의 유일한 길이다. 오직 말씀을 좇아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에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6-27).”
결국 이와 같은 주의와 경계는 ‘악을 떠나기 위한 것’이다. 그럼 결국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살기 위해서도 “삼가 행하여”야 할 때이다. 이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한다. 행함은 믿음의 실체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 가치이고 명분이다. 그러할 때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하고 오늘 말씀은 약속한다.
오늘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돌아보는 날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오신 것으로 희화하는데 이는 단순히 이 땅에서의 삶의 가치 그 이상의 영원한 생존의 문제다. 하여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하신 데 따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날’이라 하겠다. 다소 조용히 깊은 묵상과 되새김이 필요한 날로 생각한다. 서로 들떠 신나게 흥겨워할 게 아니라 숙연하게 구주의 대속을 묵상하면서 말이다.
앞서 말씀은 우리에 이에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계명 열 가지를 제시하고 계신다. 분명히 하시는 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신 5:6).” 하고 더하시는 첫 번째 계명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7).” 하시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다.” 하심으로 이 계명의 확고한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신다. 즉 십계명은 철저하게 ‘여호와의 이름’ 위에 근거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한다. 곧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주시고, 구속주시며 이를 바탕으로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는 ‘사랑의 언약’이라 해도 될 것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그러므로 “나 외에는” 하고 단정적으로 ‘나와 대립하는 것’을 ‘두지 말라’ 하시는 것이다. 이는 또한 ‘나와 병립하여 두지 말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유일하심으로 그 어떤 것과 대립할 수 없고 병립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의무이고 성경의 요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이것 외에 다른 그 무엇도 우선하거나 예외 될 수 없다.
오늘 우리 사회에 드러나는 일들이 그에 따른 증거다. 이런저런 우리의 고질적인 미신과 무속적인 사고, 생활방식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어지는 말씀도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지며” 하시는 것은 그것으로 ‘우상숭배’가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에 지배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손으로 형상화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도 부정하다.
가령 저들이 하나님이라, 하고 뚝딱 만들어낸 것이 ‘금송아지’였다. 나아가 각종 ‘신들’이 전방위적으로 온 세계 방방곡곡을 지배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설령 선한 의도(?)로 하나님을 좀 더 갈망하기 위해 어떤 형상이나 모양을 만들 때, 그 자체로 신격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마가톨릭은 물론 기독교 내에서도 성화니 성물이나 하면서 사용하는 도구나 모양은 물론 어떤 조각상 같은 것을 만들어 세울 때 사람들은 그 앞에 절하고 어떤 의식을 취하게 돼 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어떤 모양이나 장치가 아니어서, 그런 데 아무리 좋은 의도로 의미를 부여했다 해도 사람은 자고로 보이는 것에 현혹되고 그 가치를 더할 때에 신성시하게 되어 있다. 하여 성경은 절대,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하신다.
‘절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를 보면 ‘복종하다’란 뜻을 지닌다. 섬기게 된다는 것으로 그것에 예속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결국은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외적행위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행위에 의해 내적, 정신적 상태까지도 그 마음이 기울게 되어 있다. 이에 분명히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하셨다.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죄에 대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으시다. 그리하여 자신이 육신이 되어 죽기까지 그 죄를 사하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가 성립되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에 우리의 죄 곧 하나님을 향한 거역은 우리 자손의 3, 4대까지가 이르게 될 정도로 엄중하다. 즉 그 부모의 죄가 그 후손들에게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말은 후손들이 조상의 죄 때문에 멸망당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할 때에 은혜는 상대적으로 ‘천대까지 베푸느니라’ 하신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 5:10).” 그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는 비교가 안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여 우리가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망령되이’란 ‘무익하게’, ‘거짓되이’, ‘헛되이’란 뜻으로 인간의 거짓 맹세나 저주 등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섣부른 짓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는 일로 신성모독이며 마땅히 금하여야 할 일이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21).”
하여 시인은,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29:2).
그렇게 하여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부분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이는 우리로 주의 이름을 함부로 일컫지 말게 하심으로 언어가 가진 힘, 모든 사물과 사건의 개념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는 체계를 알려서 주의시킨다.
우리에게 있어 이름은 그 이름 자체로 대표성이 있는 것과 같다. 이름은 곧 대상의 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그 대상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갖고 있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면서 그분의 이름을 가벼이 취급하거나 부른다면 이 또한 말이 안 된다. 하다못해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부를 때도 예를 갖춰 일컫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어 안식일 제도는 낯선 것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그 사실을 근거로 에덴동산에서부터 명령하신 바, 쉼의 제도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1-3).”
이를 호렙 산에서 입법화하여,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하실 때,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하심으로 안식은 모두의 공통된 쉼이면서 동시에 사명이 된다. 여기서는 주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동등하게 지음 받았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아울러 이는 주인이 지키는 안식일이 단순한 육체적 유혹만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에 관계된 묵상과 예배를 위한 것임을 알게 한다. 안식은 영혼의 일에 힘쓸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보장해 주고자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평소 자기 생업에 종사하느라 말씀과 찬송을 묵상하거나 찬양하기 어려웠던 것을 감안하여 그렇듯 가만히 자신을 놓아둠으로서 영혼의 양식 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위함이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심에서 공경은 ‘무겁다’는 의미로 상대를 무게 있게 대우하라는 뜻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여기에는 그에 따른 차별적인 상급이 다르다.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심으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로 이 땅에서 길게, 장차 누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의미가 된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하심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만드신 그 한 영혼에 대하여, 예수님은 직접 살인 것과 같이 타인에 대한 증오나 내면적 분노도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이 모두는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에 대한 예의보다 그 사람을 지으시고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경외함이다.
또한 “간음하지도 말지니라.” 하심도 당시 주변 국가들의 ‘신들’에 대한 제사행위는 모두 음란하였고, ‘다산(多産)’에 물들어 성적으로 방종하였다. 제사 의식을 통해 간음이 난무하던 것으로 이를 금하심으로 “누구든지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죽이라.” 하실 정도로 엄격히 금지시키심은 결국 타종교에 대한 모방으로 제1 계명이라 할 수 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심과 이어져,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창조 질서로 일부일처의 원칙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교롭지만 인류는 오늘에도 여전히 이와 같은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곧 입법자 되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계명의 근본정신을 더욱강화시켜 “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그만큼 자기 생활에 울타리를 쳐, 근신함으로 이를 지켜야 할 것이다.
이어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 하는 것은 도적질한다는 게 ‘속이다’란 뜻으로 이웃의 재물을 빼앗거나 몰래 훔치는 것으로 이웃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그러므로 당연히 “거짓 증거하지도 말지니라.” 하심으로 모든 경우, 어떠하든지 거짓말은 일절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하심은 ‘사모하다’, ‘바라다’는 것으로 남의 아내에 대하여 욕정으로 간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추가하여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하심은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마땅히 제어해야 할 것으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시는 말씀으로도 이어지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 우리가 서로 주 안에서 함께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오늘 말씀에서도 오늘 날 우리가 각별히 유념하여 서로 존중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데서 이 사회의 혼란이 정돈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소망은 오랜 시간을 더 고통 가운데 지내고 난 뒤에야 가능할 것 같다. 이에 우리로서는,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132:7).
할 때에,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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