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신 6:25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우리끼리는 연합하여 동거함이 아름다울 수 없다. 실제 불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연합은 아름다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하여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1).”
이에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 서로가 주의 숨길로 빚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인 것을 인정함으로 서로의 존재 가치를 귀히 여기게 된다. 그럴 때 처음 사람 아담의 사랑 고백도 다소 인간적이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하고 자신을 앞세워 여자라 칭하였다.
이에 우리는 말씀으로 목숨을 다해 순종할 때 비로소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대하 34:31).” 말씀이 이루어지듯 서로가 하나 되어 연합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이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때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시는 말씀과 같이 주의 형상과 모양대로, ‘그 땅’에서 생육하여 번성하여 정복하고 다스릴 때이다. 곧 우리는 ‘그 땅의 흙으로 지음 받았다.’ 여기서 그 땅의 속성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이 가득한데, 설령 그러해도 하나님이 그 수면 위를 운행하실 때,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러질 때에 그 사랑이 충만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하나의 상황이나 사건을 놓고 볼 때 서로 다른 시각과 그 견해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 그 코에 생기가 우리 안의 숨결로 임하실 때에 우리가 결국 서로에게 하나 되어 연합하여 그 아름다움을 확보할 수 있겠다.
이에 오늘 말씀은 크게 외치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를 사랑할 때 비로소 내 곁에 두시는 나와 연합하여야 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주의 마음이 아니면 저를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란 그러하여서 서로가 마치 목숨으로 결의하고 하나인 것 같아도 어떤 돌발상황이나 위기에서는 절대 이를 이룰 수 없다. 하여,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6-9).”
이를 가르치고, 자신도 늘 곁에 두어 말씀으로가 아니면 부모 자식도 친구도 이웃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번 사태에서 서로가 떠넘기고 은연중에 악으로 하나 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 34:11).
하심으로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나 내 곁의 한 영혼을 두고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서로가 서로에게 말씀으로 가까이 하여야 하는 것은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이는 엄연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17).”
그러므로 다른 길은 없다. 그 어떤 서약이나 보증으로도 지켜지지 않는다. 속속들이 들어나는 서로의 은밀한 비밀과 그 단서들이 서로를 겨누는 총구가 되어 서로를 고소하며 마구 쏘아대는 총탄 같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다 괜찮은 줄 아는, 청맹과니들 같다. 눈뜬장님들로 멀쩡히 보고 있는 게 보이는 듯한데 실은 보이는 게 없어 한줌도 안 되는 생명을 연명하고자 다들 참 애쓰는 것 같다. 결국 이러한 사태를 보면서 깨닫는 것은 정작 나를 사랑하는 길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줄 아는 것도 주의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여,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91:14).
결국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길도 하나님과 같이 느끼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었다. 하여 왜 그처럼 하나님을 우리에게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겠다.
곧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6-27).”
곧 우리의 가장 큰 기쁨과 행복, 서로가 하나 되어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그 기쁨이 가장 나로 내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이를 알게 되면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 결국 이 땅에서의 것이 우선이 아니었다. 이는 매우 임시적이며 일시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전에는 이를 알지 못하고 어둠으로 살았을 때,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오늘도 친구가 모처럼 와서 같이 시간을 몇 시간 보내며 한나절 같이 있었는데, 시국이 시국이라 그랬는데 ‘그런 소리’나 하려고 만난 게 아닌데… 하는 아쉬움을 안고 돌려보냈다. 그런 이야기는 전화로 해도 될 것을 이른 아침 서둘러 와서 오후께 되어 갈 동안 어쩌다보니 그리 됐다. 같이 늦은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 전에 나는 아쉬운 속내를 드러내며 ‘성경 이야기’를 하길 원했는데… 하고 말을 흐리고 기도하고 헤어졌다.
예전 같으면 객쩍은 소리나 농담으로나 채워도 아쉬울 게 없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왠지 그러는 게 아쉽고 아깝다. 이러려고 그리 일찍 그리 긴 시간을 만났나, 싶은 것이 전날에 기도하며 오늘 우리의 만남이 하나님을 더욱 알고 주께 더욱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삶의 이야기로 채워지기를 기도하였다. 그렇듯 이제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9-10).”
말과 말 사이에서도 하나마나한 말로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깝기도 하다. 결국 이제 우리 삶의 척도는 말씀 위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리에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40:8).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을 때 일심(一心)으로 우리는 한 마음이 되어 연합할 수 있다.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예전에는 서로 그저 시시덕거리며 온갖 빈말투성이의 농담으로나 서로가 즐거웠다면 이제는 서로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찌 행하시는지… 이와 같은 대화가 의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119:133).
특히 오늘 같은 시국에 더더욱 말에 말을 보태어봤자 그저 다 공허할 뿐이다. 같은 쪽이든지 다른 쪽이든지 말은 힘이 없어서 자기주장에 함몰된 생각의 껍질로는 땅에 씨를 뿌린들 거둘 열매가 없다. 일련의 사태에서도 하나님이 주관하심으로 드러나는 추함과 악취와 온갖 사술과 역술과 미신과 무속에 대해 경각심을 더할 뿐 사람은 본래 다 악하여 이럴 때 저 말 하고, 저럴 때 이 말 하는 족속이기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똑같다. 분명한 것은 그러면서 우리의 썩은 부위가 드러나고 가라앉았던 찌꺼기들이 마치 폭우에 쓸려 내려가듯 어느 순간 정화될 것을 믿는다.
다만 이러한 사태가 큰 교훈이 되어 그야말로 우리 믿는 자들도 얼마나 무심하게 영적인 세계를 운운하며 사람의 상상력에 재미들려 귀신 이야기나 영화에 빠져 사로잡히거나 아무렇지 않게 그러려니 하고 받아넘겨왔는지… 깊은 회개와 통찰이 필요할 것이다. 호로, 귀신, 사바세계 따위에 덩달아 이를 좋아하며 ‘농담으로나’ 그런 세계를 즐겼었는지를 말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계획하심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그러하셨는데 오히려 사람은 다스림을 받으며, 심지어는 이러한 것들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며 우상숭배에 사로잡혀왔으니,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 7:22).” 오늘도 이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
이에 오늘 말씀은 이르시길,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곧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14).” 우리 주변의 신들, 저것들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로 천사였으나 악령이 되어 공중의 권세 잡은 세력들이 된 것이었으니… 우리가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것인데, 속수무책 그러한 무속에 현혹되어 그 앞에 절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15).”
오늘 이와 같은 심판의 경고를 알게 하시려고 일련의 사태로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계신 것이니,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18-19).” 궁극적으로는 말씀으로 살 일이다. 오늘의 이 말씀으로 서로 하나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연합함이 가능하여서 아름답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25).”
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133: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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