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신 15: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1-2
채무를 면제하거나 사람을 놓아주는 것을 “매 칠 년 끝에는” 그리하라 하신다. 매 칠 년 되는 해의 연말이 아니라, 7년을 주기로 하여 그 주기의 마지막 즉 제 7년째를 의미한다. 이를 가리켜 일명 안식년이라 하는데. 이때에는 땅도 경작하지 아니하고 묵혀 두고, 사람도 놓아주어 자유를 얻게 하였다.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2-14).”
이때에 “면제하라” 하심인데, 이는 자고로 지켜지기 힘든 일이었다. 특히 사람을 놓아 자유를 준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로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에, 원칙상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레 25:39-43).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히브리인들이라 할지라도 동족 뿐 아니라 이방인의 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47).
대개 원인은 빚으로 가난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된 경우와(39), 극도의 빈곤으로 그 부모에 의해 종으로 팔린 경우와(느 5:5), 범죄로 인해 종으로 전락한 경우이다(출 22:1-3). 이를 또한 “제 칠 년” 안식년을 지켜, 어떤 사람이 종이 된 날로부터 6년이 지나고 제 7년이 되는 바로 그 해를 가리켜 자유를 주게 하셨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출 21:2).”
그때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즉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신다.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3-4).” 그런데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5-6).”
이 모두가 자율적인 의사와 그에 따른 판결이어야 하는데, 실제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즉 제 7년째가 되어 주인을 섬기던 종이 자유롭게 될 시점이면, 주인은 그 종이 자립할 수 있도록 생계를 마련해 주라고 하시는데 이는 참으로 이상적이다. 이는 종을 자유하게 하는 제도가 유명무실한 제도로 끝나지 않게 그의 살 궁리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주인에게 있던 것이다.
종이란 자기 노력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자이므로 비록 제 7년째에 해방되어도 자유의 몸이 되기 쉽지 않다. 생활 대책이 마련되어 않는 한 그는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다 다시 또 종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인은 자신이 그로 인해 얻은 소유를 “후히 줄지니” 하고 성경은 이를 명시하고 있다. 후히 준다는 것은 충분히 주라는 것을 강조한다.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살펴보니까,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가격이 은 30세겔이었고(출21:32), 품꾼 한 사람의 1년 임금이 약 10세겔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종이 6년 동안 주인을 섬겼다고 하면 그에게 60세겔에 해당하는 노동의 대가를 주어야 한다. 설령 자신의 몸값 30세겔을 제하고도 30세겔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계산이 된다.
이것이 정착되어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하고 정하였다.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11).” 사람이며 땅이며 이를 지키고 살았어야 하는데 실제는 이 규율을 엄격히 지켰다는 말씀은 없다. 그것으로 보아 사람이 사람을 놓아주거나 땅을 쉬게 하는 일이 그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의 관심이다. 가난한 자들과 매인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난한 자와 매인 자들에 대하여 도움과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강하게 언급하시고 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0).” 이에,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시 12:5).
곧 하나님은 우리의 경건보다 상한 마음으로 주 앞에 아뢰는 것에 더욱 관심을 두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그러므로 성경은 일러,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사 25:4-5).”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애통하며 상한 심령으로 주를 바랄 때 주가 더욱 귀히 여기시듯 우리 또한 우리의 곁의 약하고 힘든 이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모두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있을 때는 별로 와 닿지 않다가도 없을 때는 꼭 필요한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각각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강도가 다르기는 할 텐데, 원칙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이 일이 사람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는 일이다. 그렇게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고 나아가 주의 나라에서도 영원한 상급이 될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이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을 생각해서는 그때마다 형평과 사정과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렇게 크게 신뢰할 수 있는 관계는 없다. 좋을 때나 좋을 뿐 다들 자기 앞가림에 바쁘고 제 코가 석 자라,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안식년에 자신을 쉬게 하는 것은 따져서 챙길 줄 알지, 채무나 종을 면제하는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우리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이에 성경은 엄히 말씀하시길,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 13:13).”
하여 이에 따른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이와 같은 엄중한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날마다 바로 세워가는 일은 필수적이다. 특히 오늘 같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사회에서 바르게 분별하고 먼저는 자신을 근신하여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마다의 사고에 갇혀 서로가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상대를 공격하며 마치 적들보다 못한 같은 민족으로 사는 일은 참 척박한 일이다. 법과 제도가 있다는데도 그 해석이 천차만별이니 그저 자기 입맛대로 국민을 운운하며 애국을 부르짖는 체 한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답답한 마음뿐인데,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서로 베풀어야 하는 마음을 알게 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가끔씩 이 말씀을 되새길 때면 가령 내가 누구에게 이해받고 사랑받는 것이 결국은 내가 헤아렸던 그 헤아림의 정도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각자 자신의 서운함과 억울함만을 크게 여기지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리 대하고 살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결국 말씀과 무관하면 생활에도 인색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가 된다. 이는 당장 이 땅에서 사는 데는 자신이 있을 때는 모르겠으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어느 가까운 날에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는 슬피 울며 후회와 탄식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히 이어지는 후회라면 그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게 또 있을까?
나의 신앙에 있어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영원이라는 끝도 한정도 한계도 없을 시간이다. 그대로 쭉, 이어지게 되는 시간의 시간 너머에서 나는 주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게 귀하다. 아주 어릴 때, 어쩌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나는 그 시간을 상상하다 오금이 저리고는 했던 것 같다. 모든 게 끝이 있어서 아무리 슬퍼도 혹은 아파도 이게 끝이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어린 게 뭘 안다고, 나는 도저히 천국에 갈 정도로 착하지도 의롭지도 않는데 어쩌지? 성경은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야기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럼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인가? 하고 어릴 때 그것으로 엄청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지옥이 무서웠던 것은 어떤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상태가 영원하다는 그 시간 때문이었다. 어린 게 그런 문제로 씨름하다 주일학교 선생님한테 털어놓았을 때, 그런 내 안의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곧 믿음이라고 하셨다.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아, 영원한 안식. 하나님과의 시간….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고로 오늘을 살면서 주 앞에서 겸손하기를. 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삼기보다 맡은 자로 주가 내게 잠시 두신 몸과 마음과 건강과 물질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교회와 형제를 돕는 일에 쓰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복이 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란,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였다.
사람을 보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오늘의 궁색함은 나의 인색함의 발로로 인함이고, 오늘의 풍성함과 감사함은 나의 너그러움으로 인함이다. 결국 그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내가 헤아림을 받고 사는 것이다. 유난히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엄격한 듯하나 엉성하여서 그 삶이나 말이 서로 맞지 않는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비극은 그런 자를 대통령으로 뽑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남에게 엄격하기란 자신이 그만큼 있다고 여길 때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그럴 때 면제하라는 것이다.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의당 마땅히 그리하라고 하신다. 이는 명령이고 사명이다. 있을 때 잘 하라는 말, 건강도 물질도 다 마찬가지다. 그것을 마치 영구적인 내 것인 줄 알다가는 손에 쥐었던 모래 한 줌 같이 빈 주먹이 되고나서야 후회가 밀려든다. 조건 없이 남에게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용기,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오늘 나의 모든 것은 주가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 11:40-41).”
있을 때, 적당할 때, 이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하는 삶으로는 기어이 자신이 당하고 난 뒤에야 슬피 울며 후회하고 탄식할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하실 때에, 우리는 주 앞에 엎드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142:1-2).
결국 우리가 남들과 다른 단 하나는,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3).
그러므로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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