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 13:3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시 140:1
거짓 선지자는 말씀을 들어 선동하고, 참 선지자는 말씀을 선포한다. 선지자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선견자’는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자이다. 두 단어가 혼용되듯 사용하여 정확한 구분이 어렵기는 하나,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삼상 9:9).”
여기서 가리키는 선지자란 정작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지 않고 거짓으로 예언하는 자이다. 이를 ‘꿈 꾸는 자’라 하는데 거짓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꾼 꿈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 계시로 풀이하여 주장한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미래에 대해 거짓 예언을 일삼는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한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2).”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은 바로 그 꿈에 의존하여 자신의 결의와 생각을 주장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32).”
저들도 사람을 현혹하는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적과 기사는 어떤 표징과 전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말씀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강한 믿음과 확신을 더하시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하나의 방편이지 기적과 기사가 목적이 아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신 13:1).” 그런데 대부분은 이를 들어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유혹한다.
이에 사탄도 이를 들어 기이한 현상을 보이거나 영적 세계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주목하는 것이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 대한 것이다.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2).”
이를 오늘 우리 사회의 혼란을 틈 타 아무개 목사나 어느 종파의 지도자가 나서서 사람들을 책동하고 준동하는 일에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저들은 이 시대의 구원자처럼 행세한다. 사람들의 격앙된 감정과 편향된 마음을 이용하여 극단적인 언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때에 오늘 말씀과 같이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지 않은 자인 것을 입증하는 행위이다. 저로 인하여 교회가 욕을 먹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다.
실은 우리 영혼이 얼마나 어리석고 연약한지… 무엇에든 기대고 의존하려는 것이 우리의 속성이다. 이에 주님은 일찍이 예언하시길,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더욱이 오늘 날과 같이 사회가 어지럽고, 여러 진영논리에 가로놓여 서로가 반목하고 원망할 때에 저들, 거짓 목사나 점술가나 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기승을 부린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9-10).”
예전에 글방을 다녔던 아이가 느닷없이 연락을 했다. 벌써 저의 나이가 서른둘이 되었다고 하니 까마득하다. 실은 전세사기를 당했는데, 그가 어디 교회 안수집사라 하고 자신들이 사기 당한 돈으로 교회에 헌금도 내고 십일조도 냈다고 하면서 내가 목사가 되었다고 하니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글의 내용은 억울함을 어디에 토로할 데가 없어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내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장문의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며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게 아닌 듯하여 뭐라 답을 못하고 있다.
사는 일이 참 가지가지라, 저마다의 사연과 그 생각이 가련하기만 하다. 아이는 그저 그 상대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니, 목사로서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는가? 하는 것일 텐데….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시대가 어떻다고 하나, 어느 때보다 정신이 약하고 마음이 강퍅하여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함몰되어 살기 마련이다. 이는 때가 가까울수록 더하여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24:5).” 그런 가운데 우리가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겠나?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4).”
일련의 사회적 혼란을 틈 타 왜들 교회가 혹은 목사가 나서서 선동하고 사람들을 충동하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아무개 목사는 두 번의 탄핵 사태를 겪는 격변의 시대에서 대중들의 선봉자가 된 듯하다. 그런 가운데도 우상은 늘 새로 태어나듯 생겨난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저들은 각기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자’고 책동한다.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2, 6, 13).”
저들은 그렇게 가만히 우리를 꾀어 시대나, 역사나,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부각시킴으로 결속을 다진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특징은 감정이 격해질 수 있는 예민한 문제를 화두로 삼는다. 이를 위해 거친 말이나 행동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격앙시킨다. 그러는 동안 자신을 마치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부각시킨다. 어느 정치가는 느닷없이 탄핵 중인 대통령이 곧 국가라며 선동한다. 저들의 특징은 아무 말이나 결부시켜 자신들의 뜻을 점철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 말에 책임은 자신들 몫이 아닌 줄 안다.
이는 사람들이 더욱 강경하게 혹은 자극적으로, 분풀이할 대상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들이 만들어지는 이유다.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왕상 11:5).” 하나님을 싫어하고 내지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과 일치하면서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왕하 21:3).”
각자 제멋대로 함부로 군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한다. 그 와중에 비행기 참사로 피해자가족을 대표하여 일하는 이를 두고 온갖 거짓 악성 댓글을 작성하여 올리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참 악하다. 사람들은 뭔가 공격할 대상을 찾거나 맹신적으로 믿을 신을 찾는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2-13).”
특히 시대가 어지럽고 불안이 가중될 때 알지도 못하는 신을 찾거나,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그와 같은 강렬한 카타르시스에 젖을 수 있는 상대를 겨냥한다.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사 42:17).”
어제도 잠시 도서관에 가다가 어느 양지바른 곳에 모인 삼삼오오 노인들을 보았는데, 하나같이 그 손에 핸드폰이 들렸고 유튜브가 틀어져 있었다. 그 내용까지야 자세히 넘겨다 볼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또한 서로 격앙되어 목소리를 높이며 누구를 욕하고 저주하는데… 아, 생의 마지막 고갯길에서 저런 데 정신이 팔려 말을 보태고 귀를 담아 정신을 쏟고 있는 것이 가슴 아팠다. 옳고 그름을 떠나, 아이의 장문의 사연을 읽으면서도 나는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기 친 자가 교회를 다니고 안수집사라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면서 법을 이용해서 여전히 잘만 산다면서 목사로서 이 일을 어찌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 것이어서 내가 뭐라 하겠나? 녀석의 경우 없는 뚱딴지같은 사연이나 연락도 어이가 없지만 극히 감정이 섞인 내용을 두고 나는 한참을 어떤 답도 못하다 밀어두었다. 세상의 목적은 우리의 믿음을 앗아가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의 역할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따르고자 하는 자의 신앙을 훼방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들의 사명이다. 저의 말에 사람들이 길에 눕고 구국의 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듯 노년의 때를 보내는 것 같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막 13:22).”
오늘처럼 거짓과 참이 혼재하고 소수이나 다수이나 저마다의 목소리에 갇히게 돼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 2:18-19).” 결국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시험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3).”
결국 우리로서는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지점에서 주께 더욱 시선을 맞추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6-18).” 오늘의 이 시련을 통해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렘 28:8-9).”
그러기 때문에 사탄은 할 수만 있다면 성도들을 미혹하려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든지 이상과 신념을 향한 것으로든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이러한 지경에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말씀으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야 한다. 그럴 때 분별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시험은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뜻과 다른 생각을 품었다는 의미이다. 교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보태는 것에도 이미 그 마음에 교회의 일에 반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여 성경은 또 단언하기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시험은 인간의 마음속에 범죄를 충동하는 것으로 올무에 빠뜨리려는 목적이 있다. 시험은 어디까지나 연단하시는 사랑의 증표 정도이지 그 근본을 흔들어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게 아니다. 결국 시험은 신앙을 돈독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시험을 제외하면 모든 게 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기 위함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이 또한 근본은 사람이 자신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주어졌다. 이에 거짓 선지자들의 교활한 유혹을 극복하는 데는 온전한 신앙만이 살 길이다.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내밀한 교제만이 주를 바라게 할 것이다. 곧 주와 연합함으로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22).”
하여 나는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 주께 간구한다.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
(140:1-3).
그것으로 현실적인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그 영혼이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이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로 오직 주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랄 뿐,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4).
이에,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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