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전봉석 2025. 1. 4. 05:5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신 14:2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시 141:3-4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나로 이어졌다. 어제는 거짓 선지자, 선견자 등을 주의하라 하셨다.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3).” 우리가 구별할 줄 알기 위하여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을 주의하고, 서로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나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피하게 한다.

 

가령 어제 하루도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대통령 체포 여부에 온통 관심이 갔다. 뉴스를 보며, 부끄러움은 나만 그런 것인지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 뒤에 숨어 회피하는 이를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누구와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될 때 ‘그만하자’ 하고 서로의 화두를 바꾸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물을 때 다른 쪽과는 논쟁과 반목이 같은 쪽과는 성토와 원망의 말이 오갈뿐이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4-5).”

 

이 세상 그 어떤 주제의 말이든지, 자칫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이에 어제는 말하기, 듣기, 생각하기에 대한 주의를 주셨다면 오늘은 실질적으로 먹는 것에 대하여 우리의 몸의 성결을 주목하게 하신다.

 

그것은, “너희는… 여호와의 자녀니” 그러하다. 우리로 구별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 하다못해 운동선수는 평소 몸을 단련하고 노래하는 이는 목을 관리하는데 우리는 우리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단련하고 어떻게 관리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히 성별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따라 살 때 가장 복되다.

 

운전하고 오면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하는 찬양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며 한 손을 높이 올리게 되었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의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신 데 따른 말씀이다. 오늘을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우리를 엄습하고 더러는 두려움이 앞서고 염려와 근심이 나를 옥죄곤 하지만,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더욱 감사한다.

 

어제도 몸이 좀 나아졌나 싶던 것이 도로 목이 잠기고 힘들어서 병원으로 갔다. 독감 검사를 했으나 다만 목이 부었고 염증이 많다며 항생제와 여러 약을 3일치 지어왔다. 주의 자녀로 산다는 일은 아플 때도 안 아플 때도, 좋은 일일 때도 나쁜 일일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할 때 그 사실은 더욱 선명해진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나는 내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나의 구주로 섬기며 살 수 있는 이 일이 참 기적 같다.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현실을 반추하여 볼 때 믿음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도대체 믿어질 리 없는 일에 대하여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하신 말씀을 내가 어찌 임의로 하고, 안 하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리하기를 바랄 때 드러나는 나의 증거가 있었으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내 안의 이 둘이 싸우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8).”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늘 그러고 싶어 하는 것을 본다. 하지 말아야지, 하고 있다 다짐하면 그게 더 하고 싶어진다.

 

우리의 안의 소욕은 그러하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이와 같은 삶의 열매가 나의 일상에서 맺어지게 하시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인가? 나는 할 수 없으나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가 이미 해주신다. 나보다 앞서서 나의 길을 인도하고 계셨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곧 죽은 자를 기념하거나 그리워하여 몸에 문신을 하거나 자해를 하는 일은 죄악 되다. 고대의 많은 사람들은 고행의 의미로도 이러한 풍습에 시달렸고, 현대의 사람들은 이제 자기만복과 서로에게 잘 보이려고 문신을 한다. 더욱이 자해는 스스로에게 끔찍한 일이어서 이는 치료가 필요하다. 모두는 죄의 문제다.

 

당시 이교도들은 장례식 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지옥에 가지 않기를, 각자의 신들에게 빌며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자해를 자행하였다. 고행주의, 자학, 자책 등은 모두 ‘신들’의 마음을 움직여 동정을 구하고자 하는 일로 여겨졌다.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28).”

 

또한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하심은 대머리지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도 그랬듯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관습상 머리털을 밀지 않았다. 대머리는 으레 수치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조국의 멸망 앞에서 머리털을 밀고 애도하기도 하였다. 이때 죽은 자를 위해 지나치게 호상(護喪)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다하는 동안 정신이 온전할 때 주께 가까이 하여 사는 것이 가장 귀하다. 어릴 때나 혹은 나이 들어 치매가 오면 진정 생의 가치나 소망을 잃을 수 있다. 아흔하나가 되는 우리 장모의 경우 치매가 오시는가? 가끔씩 느닷없는 소리와 아내와 나를 긴장시킨다. 그래서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조끼를 뜨개질해서 목도리와 장갑도 해달라고 한다. 지난달 초에 뜨개질로 만들어준 조끼가 작다고 하여 어제는 하루 종일 그것을 도로 풀고 코를 세며 계산을 했다. 그러는 동안은 정신집중이 되어 엉뚱한 소리나 생각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런 걸 볼 때면, 내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이처럼 새벽에 올라와 예배를 드리는 일과 어디 산책을 가는 게 복이다. 내 눈으로 읽고 쓸 수 있을 때 성경을 묵상하고 한 손으로나마 글을 쓸 수 있는 게 복되다. 있을 때 감사하지 못하면 있는 것도 잃는다. 작은 것으로 감사하면 더 큰 것으로 맡기신다. 형편도 안 되면서 교회 식구들과 식사 한 끼 하라며 후원헌금을 보내는 이나, 자기 형편도 어려운데 교회를 위해 매번 보내오는 헌금으로 교회가 이어져간다. 나는 늘 수입이 없는데도 매번 그렇게 또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 소망과 가치는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두고 사는 일은 좌절의 순간에도, 감사할 수 없는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슬픔을 치른다. 돌아오는 주일은 둘째 동생이 와서 설교를 전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필리핀에서 그만 한국으로 부르시는 데 있어 ‘어떤 아이 일’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상태라 어디 부교역자로도, 개척도 하기 힘든 상황에 몸만 자꾸 상하여서 걱정인데… 걱정이라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같이 싸우겠나? 그렇다고 억울함을 붙들고 한탄만 하겠나?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의 수고로운 삶은 ‘하나님의 안식’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한다. 잠들기 전에 몸을 끙끙거리며 앓다 깊은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나오는 길이어서 그랬을까?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하는 찬양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고 한 손을 높이 들게 되는 것도,

 

시편 70편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 나를 건지시는 이

여호와여 지체 말고 내게 임하소서

가난하고 궁핍한 내 마음 가운데

여호와여 속히 임하소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 나를 건지시는 이

여호와여 지체 말고 내게 임하소서

가난하고 궁핍한 내 마음 가운데

여호와여 속히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 나를 건지시는 이

여호와여 지체 말고 내게 임하소서

가난하고 궁핍한 내 마음 가운데

여호와여 속히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 나를 건지시는 이

여호와여 지체 말고 내게 임하소서

가난하고 궁핍한 내 마음 가운데

여호와여 속히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 나를 건지시는 이

여호와여 지체 말고 내게 임하소서

가난하고 궁핍한 내 마음 가운데

여호와여 속히 임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임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임하소서

(찬양가사 복사)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죽은 자에 대한 사연은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이를 슬퍼하지 않게 하심은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 곧 우리로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음과 하나님의 안식에서 더는 고통도 슬픔도 없이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생의 삶을 소망하게 되는 일이었으니….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

 

그러니 살았으나 죽었다 하실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더욱이 오늘 같은 날 서로가 나뉘고 찢겨서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며 서로들 선동하는 이 시대를 맞아,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6-17).” 저들은 서로 살았다고 하고 죽은 자일 수 있고, 우리는 죽은 자인듯 소망이 없는 것 같아도 이마 산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

 

미쳐서 날 뛰는 세상에서,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렘 2:27).” 그러한 저들을 보며 나는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 앞에서 나를 돌아보려 한다.

 

오늘 말씀은 이게 각설하고,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 14:2).

 

나는 영원 전부터 거룩히 성별해 놓으셨다는 사실 앞에 더욱 굳건할 수 있다. 돈 좀 없으면 어떻고 건강이 좀 약하여 늘 빌빌거린다 해도 어떻겠나? 백세시대를 운운하지만 그러느라 하나님 없이 죽기 살기로 사는 것보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4-45).”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아멘, 하고 손을 높이 들기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그러니 눈물이 먼저 나고 가슴이 뜨거워져 두 손을 들어 주를 찬송하게 되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따라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도 살 수 있다는 게 그 어떤 보람과 희망보다 크고 또 넘치는 은혜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친구에게 자주 퇴직하고 같이 성경공부하자, 죽음에 이르는 훈련을 하자, 남은 생을 주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자… 하고 습관처럼 건네지만 늘 돌아오는 말은 아직 둘째가 대학을 졸업 못했고, 집 때문에 얼마의 대출이 있고, 무엇보다 아직 자신은 젊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어제도 그런 소리만하다 신년 인사를 다했다.

 

듣기 싫어하는데도 계속 같은 말로 괴롭히듯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은 저의 열심 때문이다. 교회가 좋고 성가대도 좋고 말씀도 좋은데, 그 정도여서 굳이 더… 하고 저는 나머지 자신의 일상을 놓기 싫어한다. 가까운 친구들과 어떤 계기로 모여 술 한 잔 하는 즐거움과 거의 30년 세월을 같이 지낸 직장동료들과의 하루 일과를 그만둔다고 생각하면 불안하다고 했다. 몸에 밴 날들이 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한데 오늘 말씀은 “너를 택하여” 선민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여하신 일상에서, 어떤 직업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으로 주가 기뻐하신다. 이를 알고 갈등하거나 순종하거나,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141:1).

 

하는 오늘 시인의 마음으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2).

 

이에 나는 요즘 더욱 간구하고 주의하기를,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3-4).

 

아무 말 대잔치 중에 있는 우리 사회에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