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전봉석 2025. 1. 6. 05:59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신 16:20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 143:8

 

 

아빕월은 신록의 계절로 ‘푸른 이삭’을 뜻한다. 양력 3, 4월에 해당하는데 히브리 민간력으로는 7월에 해당한다. 이때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여, 이후로는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았고, 종교력 제 1월이 되었다(출 12:2).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후부터는 바벨론식 이름인 니산월로 바꾸어 불렀다(느 2:1, 에 3:7).

 

아무튼 유월절 예식은 아빕월 10일부터 준비해둔 어린 양이나 염소를 14일 저녁에 잡아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 의식으로 이뤘다(출 12:3-11). 뿐만 아니라 그 달 21일 저녁까지 지키는 무교절 행사(15-20)를 모두 포함하여 유월절을 지켰다. 이는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하시는 오늘 말씀으로 귀결된다. 곧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내린 열 번째 장자의 죽음에 따른 재앙으로, 그 날 밤에 황급히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수 있게 되었던 사실을 가리킨다(출 12:29-42). 따라서 그 밤을 <여호와의 밤>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 12:42).”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살피다보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우리 개인의 구원 역사가 담겨 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은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 하심으로 오늘 우리가 우리 사회의 혼란과 전세계적으로 전쟁과 난리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하심은 그렇지 못한, 공의롭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또한 ‘모세의 재판’에 나타나는 근본으로,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공의의 정신>’이다. 이 땅에도 사법부가 있고, 그 시대와 사회 정의에 맞는 상식과 규범이 있다고 하나 이를 또 저마다의 해석과 기준으로 그때마다 달리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신 1: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더욱 준엄하고 엄격하게 재판장들의 공정한 판결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뇌물을 받고 판결하면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없다. 어느 진영논리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면 그 또한 공의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원리는 본래 그 출발이 잘못 되었고, 그러므로 향하여 가는 방향도 옳지 못하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사회가 이처럼 어지럽고 서로 갈라져 반목하고 대립하는 것은 마땅하다. 사회는 점점 더 이질적으로 변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점점 저 적대감으로 공격적이 될 것이다.

 

이에 성경의 영웅들을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고 정확히 명시된 인물은 에녹 한 사람이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저의 특징은 하나님과 동행한 자이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창 5:21-23).”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하고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물론 다른 여러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하였겠으나 에녹은 묵묵히 ‘하나님의 경고’ 즉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과만 동행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므두셀라’의 뜻은 심판으로 그가 죽은 날에 노아의 홍수 심판이 이루어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에녹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였고 우리는 모두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서로의 출발이 다름으로 그 향하는 바가 각각이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모든 인류는 은혜가 아니면 주를 바랄 수 없고 주께로 향해 갈 수 없다. 스스로의 다짐과 목표로 이뤄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그렇게 해서 저마다의 의로 의롭다하심을 받으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것 같다. 신앙이 부담스럽고 주와 동행하는 것이 전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것도,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선뜻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다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과 강박에 시달릴 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하시는 말씀으로, 오늘 내 모습 이대로 주가 받으시며 기뻐하신다는 데서 에녹의 동행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나에게 있어 올해 되새기는 말씀으로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 하시는 예수님의 엄명이다(눅 17:32).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매우 단호하고 엄중하신 의미다. 다 이룬 줄 알았거나, 이만하면 됐겠다고 여기거나, 이에 설마… 하고 안이하게 구는 마음에 경종을 울린다.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은 교훈을 알게 한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민주주의라는 허상과 다수주의라는 실상이 어떠한가를 ‘저 한 사람’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인간의 헌법과 제도라는 게 얼마나 유리 구두 같은 것인지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모두가 이를 신고 달리기를 하지만 저마다 깨져 그 발이 상할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이에 따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5).”

 

곧 에녹의 동행은 하나님과 연합한 자로 그의 주어진 생을 묵묵히 준행하였던 것이고,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수 천 년 전 저의 에녹의 동행은 오늘에 이르러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여,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18-19).”

 

오늘 날 이 땅에 드러나고 있는 온갖 사술과 역술과 사람마다의 속셈이 일치하여 ‘꾸며낸 겸손’으로 온갖 ‘신들’ 곧 ‘천사 숭배’에 도취되어 산다. 남은 인생을 두고 나름의 제 2의 인생을 계획한다고 하는 이들에게 나는 <에녹의 동행>을 권고한다. 이는 우리의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하시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에 예수님은 이르시길,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곧 오늘을 살면서 세상은 최첨단을 운운하며 마치 장밋빛 인생을 논하는 듯하나 우리의 남은 생은 주를 향하여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에녹의 정신으로, 조용히 그러나 무던하게 주와 동행하기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하심과 같이, 곧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는 삶’으로 가능하여진다.

 

우리는 더러 너무 많은 계획으로 염려를 끌어온다. 무엇이든지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으로 근심을 안고 산다. 이를 또 신앙 안에서도 대단한 것인 양 마치 사랑의 빚을 되갚아야 할 것 같은 부채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여럿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먼저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 이는 말씀으로 따라 사는 일이겠으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심은 성령의 열매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결과가 아니라 주가 이루어주실 것으로, 이 모든 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서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견딤과 오래 참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실 것이다. 이에,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30).”

 

곧 오늘 본문의 유월절을 지키는 일도 무교절이나 칠칠절을 기억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이를 두려워할 줄 앎으로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1-22).” 이로써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택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라 해도, 하여 사람들은 쓸려 다니는 안개와 같이 부화뇌동하여 이리저리 휩쓸린다 해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는 데 따른 그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4:13, 5:17).”

 

하여 오늘의 이 모든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그러할 때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공의로 굳게 서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신 말씀에 따른 삶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다 갈 것이다! 세상은 이러다 망하게 돼 있다. 점점 더 혼탁하여지고 사회는 가치를 잃고, 사람들은 둘로 갈리며, 자연은 더욱 더 파괴됨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우리도 다를 바 없었는데,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16:12).” 하시는 오늘 말씀을 따라,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17).” 나의 오늘 하루도 힘껏 드려지는 날이 되어,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20).” 이에,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143:1).

 

우리의 기도는 간절하여져서,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5-6).

 

하여,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8).

 

이에,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10-11). 아멘.